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Jan 31. 2020

일어날 수밖에 없어서 일어났다 1

 오늘 날씨가 안 좋은가 보다. 바람이 세게 부는지 창문은 덜컹이고 있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창문이 잘 안 닫히기는 했다. 일주일 전쯤 오른쪽 창문과 창틀을 연결하는 경첩이 떨어져 나갔다. 나무 창틀인 데다 집 자체도 오래돼 나사못이 고정되지 않았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열고 닫기를 반복하면서 나사못 구멍이 해진 거 같았다. 못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아예 구멍을 새로 내자니 께름칙했다. 원룸살이를 하는 그의 입장에서 방 어딘가에 쓸모없는 흔적, 더 정확히는 생채기를 내는 것은 집주인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다. 집주인은 그가 창문을 망가뜨렸다며(이미 망가졌던 거지만), 관리를 잘 못했다며(그가 이 방에 처음 왔을 때부터 빛이 들지 않는 화장실 문 맞은편 구석에 핀 곰팡이는 마치 집주인인양 버티고 있었다), 이런저런 빌미와 논리를 한참을 앞세운 후에야 그에게 가장 치명적인 말을 던질 것이다. 수리비를 내놓거나 보증금에서 까거나.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돈이 아까운 것도 아까운 거지만 이런 하찮은 방 하나를 덜렁 내놓으며 마치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요새나 성을 내준 것처럼 구는 집주인에게 또 다른 불로소득을 안겨주기 싫었다. 그래서 그는 창틀에 새 구멍은 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했다. 달랑 두 개 달려 있는 경첩 중 하나가 빠지자 창문은 마치 공포영화 속 좀비가 거의 잘려나간 다리 한쪽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남아 있는 아래쪽 경첩은 어떻게든 혼자 붙잡아보겠다며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안쓰러웠다. 황새를 쫓아가는 뱁새의 가랑이가 이런 모양일까 마치 곧 찢어져 나갈 것처럼 긴박한 팽팽함이 눈으로도 보였다. 반면에 몇 년 혹은 몇십 년은 이어졌을 속박에서 막 벗어난 창문 위쪽은 겨우 얻은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 어떻게든 창틀에서 더 멀어지려고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살을 섞은 정이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들이 있든 뭐가 됐든 온갖 정이 다 떨어진 아내가 이혼 서류를 내던지고 집을 나가려고 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치졸한 남편이(아마도 남자 쪽에서 바람을 폈거나 아무튼 문제가 있었던 거 같다) 상대의 가랑이를 붙잡고 버티는 거 같았다. 상체는 하염없이 멀어지는데 아래쪽은 굳은 시멘트에 꽂힌 것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촌극. 그것이 지금 창문의 실상이었다. 이러다가는 무슨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았다.


 무슨 수를 쓰긴 써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점토형 접착제가 생각났다. 언젠가 TV에서 손에서 몇 번 만 조물딱 거리고 난 뒤 붙이면 자동차도 붙일 수 있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이 광고를 보며 혹시나 실수로 저걸 껌으로 착각해서 씹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궁금했던 것도 떠올렸다. 아무튼 그걸 사서 몇 변 조물조물거리다가 해질 대로 해진 구멍을 채우 나사못을 끼우면 문제는 해결될 거 같았다. 이제 갈라서려고 하는 저 부부(부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에게도 이처럼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면 좋으려면. 


 그게 정확히 뭔지 제품은 이름까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비슷한 뭐라도 있겠거니 하고 집 근처 잡화점에 갔다. 역시 뭔가 있긴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종류도 많았고 그만큼 고르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어떤 건 나무 재질에 특화됐다고 하고 어떤 건 철 재질에 특별히 뛰어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써져 있었다. 창틀은 나무인데 나사못은 철이다. 이럴 땐 무엇을 해야 할까? 반은 나무용으로 채우고 나머지는 다른 걸로 채워야 하나? 이 순간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게 짜증 났지만 그렇다고 집주인에게 생각하지 못한 소득을 안겨줄 수는 없었으므로 신중히 골라야 했다. 그런데 결론은 의외로 이런 짜증 덕분에 매듭지을 수 있었다. 집주인 좋은 꼴을 할 수는 없었다. 대충 적당히 살 만큼만 버티면 됐다. 그 뒤는 알아서 하라지. 그래서 그는 그냥 제일 산 걸로 샀다.



 왠지 모를 뿌듯함을 한껏 안고 그는 집에 도착했다. 왠지 신났다.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이미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정해져 있는 레고나 장난감 쌓기보다 나무젓가락이든 길에서 주운 나무 조각이든 그런 걸 가지고 되는 대로 뭐든 만드는 걸 좋아했다. 이렇게 붙이고 저렇게 자르다 보면 16세기 대서양을 가르던 해군 함선이 되기도 했고 흥선 대원군이 재건한 경복궁처럼 보이기도 했다(사실 그렇게 이름을 붙이면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 모두가 그렇게 봤다. 실제로는 그냥 칼집 흔적이 난무하는 나무 조각에 불과해도). 물론 이 관점에서 보면 떨어져 나간 경첩을 붙이는 건 딱 그의 흥미와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이미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간만에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만든다는, 그래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쁨에 이미 한껏 취해 있었다.


 과유는 불급이라고 했던가. 애초 계획대로 그는 사 가지고 온 점토형 접착제를 조금만 잘라 몇 번을 조물딱 거리다가 나사못 구멍에 집어넣었고 못을 고정시켰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결과는 좋았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사못은 제자리를 찾은 양 떨어져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지금은 나가네 마네 하는 저 커플이 한창 좋았던 시절 떨어지고는 못 살 때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도취된 그는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딘가 경첩과 창틀 사이에 살짝 벌어진 틈이 신경 쓰였다. 여기도 접착제를 채워 붙이면 새 창문처럼 딴딴할 거 같았다. 그리고 이왕 손본 김에 아래쪽 경첩에도 작업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결심이 굳은 그는 이미 굳어버린 나사못을 다시 돌려 뱄다. 그리고 빈틈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부분에 접착제를 채우고 다시 나사못을 조였다.



 여기서 멈췄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눈에 이 창문은 빌어먹을 집주인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작품이었다. 자그마한 실수도, 결점도 없어야 했다. 더욱 안전하고 단단한 창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만이 남았다. 그래서 그는 경첩 위에 남은 접착을 바르기 시작했다. 땅에 내린 관 위에 모래와 흙을 끼얹는 것처럼 경첩과 나사못 대가리를 아예 지상과 단절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면 혹시나 말도 안 되는 가능성으로 관 속의 시체가 되살아나도 이미 덮어진 관을 열고 나올 수 없는 것처럼(그는 땅속에 관을 묻는 진짜 이유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게 하기 위한 것), 퇴로가 막힌 나사못도 다시는 창틀과 떨어질 수 없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화룡점정, 궁극의 한 수였다.


 문제가 생겼다. 창문이 닫히지를 않았다. 물론 열리고 닫히기는 했지만 걸쇠를 잠글 수 있을 정도로 꽉 닫히지 않았던 것이다. 경첩과 창문 사이에 접착제를 채우면서, 그리고 그 위에 또 한층에 접착제를 쌓으면서 딱 접히지 않게 된 것이다. 마치 창문 사이에 절대 떼어낼 수 없는 돌멩이가 낀 것처럼, 어깨뼈에 나사못을 박은 사람이 양팔을 등 뒤로 뻗지 못하는 것처럼 창문은 일정 각도 이상으로는 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억지로 힘을 누르다 보면 걸쇠를 걸어 잠글 수는 있었지만 예전과 같은 깔끔함을 잃은 창문은 서로 엇갈렸다. 그렇게 빈틈이 생기다 보니 그 사이를 놓칠 리 없는 바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면 창문은 서로 짓이기면 삐그덕거렸다. 이걸 보면 그 여자와 저 남자는 어떻게 이어 붙인다 해도 그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거라 그는 생각했다.



 밖에 강한 바람이 부는지 창문은 여전히 덜컹거렸다. 가까스로 걸쇠에 건 갈고리는 힘에 부쳐 보였지만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소리에 잠에서 깬 건 아닐까 생각한 그는 휴대폰 액정에 뜬 시간을 봤다. 아침 9시 34분. 적당히 잘만큼 잤고 일어날 법한 시간에 일어났다. 저 소리가 영향을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유일한 요인은 아닌 듯싶었다. 


 이날 그는 간만에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면 인사는 하고 서로 안부를 묻는 정도 거리의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집 방향도 같았다. 다만 그 외에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학교가 같았고 집 방향이 비슷했을 뿐이다.


 그가 점토형 접착제를 사러 갔던 집 근처 잡화점에 가던 중 그를 만났다. 잡화점 입구로 들어서려는 찰나 그를 알아본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느니 어쩌니 하는 그럴듯한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점토형 접착제를 사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뺏기는 게 또 짜증 났고 억울했다. 몇 초만 빨랐어도 그와 마주칠 일 없이 가게에 들어갔을 텐데,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갈 걸 하는 후회가 부아 치밀듯 솟구쳤다. 어떻게든 긴 대화(사실은 3분이나 됐을까)를 마치고픈 그는 다음에 밥이나 먹자는 누구나 하는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정말로?) 몇 날 며칠을 굶은 거대한 참다랑어가 입맛을 돋우는 미끼를 덥석 물고는 사방팔방 난리를 치는 것처럼 한껏 상기돼 당장 날을 잡자고 덤벼 들었다. 당황한 그는 이번 주말에 보자며 또다시 물고기 유인용 떡밥을 던졌고, 그 향에 눈이 돈 온갖 잡어들이 달려드는 것처럼(이 모든 것은 그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다) 그는 이번 토요일 오후 6시에 여기서 만나자고 확정 지었다. 그리고 그날이 오늘이다. 피곤해진 그는 덜컹거리는 창문을 뒤로하고 다시 잠에 들기로 했다. 그렇게 잠이 올 때까지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누워 있다가 한 30분쯤 잔 듯 안 잔 듯한 상태로 있다가 눈을 떴다. 


매거진의 이전글 I'm lovin' i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