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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고합시다 May 02. 2019

여태 푸른 마음 간직하고서

누구나 때가 되면


문득,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하는 생각에 놀랄 때가 있다. 대학 신입생 때 찍은 단체사진이 아득한 옛날인 것처럼 촌스러울 때. 무리해서 운동하고 나면 근육통이 아니라 관절통이 찾아올 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 앞에서 불같이 대들고 싸우는 것보다, 적당히 무시하는 게 더 괜찮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떤 새로운 기회 앞에서, 이것이 얼마나 돈이 될 것인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을 때.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관계와 달리, 사회적인 관계에선 순수함이 더 이상 미덕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참으로 어설프게도,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부정적이었던 시절도 다 지나버린 상태라, 이런 식의 변화가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 누구나 때가 되면 적당히 기울고, 적당히 물드는 법이니까. 푸르다 못해 시퍼랬던 청춘이 서툴렀던 만큼의 가능성을 담고 있던 시기였다면, 때에 맞춰 제 색깔을 찾아 익어가는 청춘 이후의 삶은 분에 넘치지 않는 자기다움을 알차게 채워가는 시기일 테니까. 




귤에게도 청춘이 있다면


기왕 과일의 비유를 빌어온 김에, 만약 과일에게도 청춘이 있다면 분명 제철이 오기 전의 모습이지 않을까. 사과는 빨간색, 포도는 짙은 보라색, 그리고 귤은 노란색. 저마다의 자기다운 색을 내기 한참 전이 바로 과일의 청춘일지도 모른다. 덜 익은 과일은 푸르고 끈질기지만 그 맛이 쓰고, 잘 익은 과일은 색이 곱고 쉽게 떨어지지만 그 맛은 달콤한 법이니까. 꼭 청춘이 그렇게 푸르고, 끈질기고, 쓴맛이었으니까. 


해서, 만약 보통의 귤이라면 푸른 ‘청귤’ 상태에서는 제맛을 내지 못할 것이다. 서툴게 자란 우툴두툴한 껍질이 햇볕과 양분을 속으로 채우기보다, 겉모습을 꾸미는데 치중하는 탓이다. 마치 비싼 브랜드 옷을 입고 으스대던 학창시절이나 행동보다 말이 앞서 열정만으로 모든 걸 해낼 수 있다고 믿던 이십대 초반의 나처럼. 그러다 차츰 푸른 기가 빠지고 겸손한 노란 빛깔이 만면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그제야 달콤한 물이 속에 옹골지게 들어찬다. 단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알맹이가 튼실해지면 굳이 청춘이 아니어도, 아니 굳이 덜 익은 ‘청귤’이 아니어도 충분히 귤로서 제 역할을 해낸다.


누군가는 청춘의 모습으로 어른이 된다


그런데 제주 청귤을 먹고 나면, 청춘과 어른의 이분법적인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그 강박은, 어쩌면 어른이 되어버린 자의 후회를 덮기 위한 얄팍한 말장난이었다는 것을. 


제주 청귤은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덜 익은 귤’이라는 의미의 ‘청귤’이 아니다. 이원조의 『탐라지』에 “청귤은 크기는 산귤과 같고, 가을에서 겨울에 색깔이 파랗고 맛이 시어서 2~3월에 이르면 산이 적당하고, 5~6월이 되면 묵은 열매는 노랗게 익고, 새 열매는 파랗게 변하고, 파란 새순과 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으니 참말로 절경이다. 이때에 이르면 단맛이 꿀과 초를 조화시킨 것 같다. 7월이 되면 열매 속이 모두 물이 되어 맛이 달다. 8~9월에 열매는 다시 푸르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귤은 청춘의 모습으로 어른이 된 귤이다. 


그렇다고 청귤의 맛이 어딘가 서툴고 쓴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반적인 귤보다 단맛과 신맛이 더욱 강하다. 이토록 알찬 내실이라니.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이런 청귤을 닮은 사람들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로컬 매거진 <하트人부산>을 제작하면서 돈보다는 가치와 열정을 좇는 다은이. 국장이라는 직책 뒤에 숨어 뒷방 늙은이로 지낼 법도 하지만, 늘 현장에서 취재하고 직접 대본을 쓰며 프로그램을 제작하시는 유정임 국장님. 그리고 아직도 밤하늘의 달과 별을 살피며, ‘달이 너무 예뻐서 전화를 했다’고 말하는 내 아버지. 



글밥 먹고 사는 작가가 된 건 


내가 글로 밥을 벌어먹겠다고 다짐한 건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가 아니었다. 글 쓰는 게 좋아서였다. 해서 취직 잘 되는 학과를 1년 만에 내팽개치고 취준생들의 무덤이라는 국어국문학과로 전과를 했고, 10년 동안 사랑해온 여자를 옆에 두고도 어떻게든 글로 돈을 벌어보겠다며 이렇게 고군분투 중이다. 


적당히 체념하고, 적당히 순응하는 삶. ‘사는 게 다 그런 거지’를 좌우명으로 삼는 삶. 그렇게 나도 노오란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꽤 괜찮은 일이라고. 하지만 내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청춘의 한 조각은 있다. 글을 쓰는 일이다. 누군가 내게 글을 포기하고 살라고 하면, 자신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내 존재 어딘가에서 푸릇한 기운이 배어나오는 것만 같다. 아직 청춘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나를 가슴 뛰게 만든다.


꼭 글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포기할 수 없는 청춘의 한 조각은 있다. 짧은 팔다리로 버겁게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백발의 노인들처럼, 어떤 나이가 되더라도 푸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제주 청귤은 푸릇한 청춘의 얼굴로, 여느 귤보다 더 제맛을 내니까. 만약 수십 년 뒤, 누군가 내게 여태 푸른 가슴 간직하고 사는 비결을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런 한 조각을, 자신의 가장 깊숙한 주머니에 넣고 살면 된다고.




청귤 레시피


1.레시피가 필요할까요? 껍질만 가지런히 벗겨서 먹으면 되는 걸.

2. 그래도 기왕이면 한입에 넣어 드시기보다, 모양에 맞춰 떼어 먹어보세요. 한 조각, 한 조각마다 감탄하게 될 테니까요.

3. 남은 청귤은 껍질째 얇게 저며 청귤청으로 만들면, 추운 겨울 내내 ‘따뜻한 푸르름’을 즐길 수 있어요. 

4. 스테이크를 먹을 때, 살짝 구워 먹어도 좋아요. 너무 구우면 짓무르니까 겉만 익힌다는 생각으로. 특히 겨울에 구운 귤만한 것도 없죠.

5. 귤을 선물할 일이 있다면, 제주 청귤 어때요? ‘늘 푸른 청춘으로 살아가는, 당신을 닮은 청귤’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글쓴이 : 김경빈  (먹고합시다 필진 / 시집 <다시, 다 詩> 저자 / 브런치 매거진 연재 中)




푸른한 청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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