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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임풀 Sep 23. 2022

내가 감히 나를 평가해?

나를 부끄러워하는 사태

1. 수치심은 자신에 대한 특정한 믿음이다.



  수치심의 도식적 특징을 명료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수치 감정이 일종의 자기 평가적(self-assessment) 감정이라는 점에 주목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철학자 가브리엘 테일러(Gabriele Taylor)는 수치심이 자기 평가적 감정의 일종이며 이 감정은 자신에 대해 특정한 종류의 믿음(belief)을 형성함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핵심적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위 자기 평가적 감정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자부심, 굴욕감, 죄책감, 수치심과 같은 정서들은 어떤 특수한 종류의 믿음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무엇보다 그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object)으로 삼고 자신과 관련한 믿음을 이 감정의 필수적 구성요소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굴욕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을 만큼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태를 경험하며, 자부심은 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지위(status)가 가치 있음을 믿고 있으며,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자기 관계가 자리 잡고 있기에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수치심은 평가적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분노 이면에는 자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대우받아서는  된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존중의 태도가 자리 잡고 있는 반면, 수치심에는 부정적인 자기 평가의 역학이 내재되어 있다. 자기 평가적 감정을 경험하는 주체는  믿음이 담고 있는 명제적 내용과 자신을 연결시키며, 이로 인해  믿음을  감정을 구성하는 요소로 만든다.



  우리는 자기 평가적 감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감정 주체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한다. 다시 말해, 자기 평가적 감정을 경험하는 주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일련의 평가를 수행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는 단지 외적 상황의 인지 및 판단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과 관계있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이때 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비추어 이를 해석한다. 자기 평가적 감정이 다른 감정들과 구별되는 점은 상황 판단의 최종적 화살을 자기에게 돌린다는 점에 있다. 그는 기쁨처럼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재미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박장대소하는 등 단지 상황을 평가하고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자신만의 고유한 성취 혹은 실패의 틀 속에 대입하고 그 틀에 비추어 다름 아닌 자신을 평가한다.



  둘째, 자기 평가적 감정에서 일련의 믿음은 그 감정을 경험하는 구성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감정 주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드러낸다. 다시 말해, 그가 처한 상황별로 자신이 정상 혹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종의 가치가 항상 소환된다. 나아가 우리는 각 상황마다 그 가치가 된 기준을 어디에서 끌고 들어오는지 물어볼 수 있는 데, 이 기준은 각 개인의 독특한 습관, 개별 집단마다 존재하는 고유의 규칙들, 사회적 평판이나 기대 등 이런 종류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의 외연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다. 이 기준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옳고 그름을 감정 주체에게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도덕적 혹은 규범적 힘을 가진다고 볼 수 있지만, 이 기준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엄밀한 법령이나 규칙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주로 타인에게 초래된 피해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며, 이와 관련된 규범을 어겼을 때 경험되는 죄책감에 비해 수치심이 발생하는 외연은 좀 더 넓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발생하는 기준이 다소 좁은 옳고 그름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지극히 주관적인 삶의 행태에서도 발생한다. 공공장소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넘어져서는 안 된다거나, 이성 앞에서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운동선수로서 특정한 삶의 패턴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등 다채로운 삶의 영역에서 사뭇 서로 연결되기 힘든 방식으로 그렇지만 개인으로 하여금 삶의 동력이 되거나 또는 제약을 가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적이다. 이 기준들은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자아를 넘어 사회적 층위를 가진다. 이 기준은 때로는 보편적인 옳고 그름의 영역과 관련되면서도, 사회문화적인 관습 또는 개인의 신념의 영역에 넓게 걸쳐있는, 한 감정 주체가 매번 스스로 따라야 한다고 간주하는 것들을 총칭한다.



  셋째, 자기 평가적 감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폭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감정을 촉발한 믿음은 그 안에 한 주체가 처한 상황에 대한 호의적 또는 비호의적 태도, 즉 긍정 혹은 부정적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자신이 중요한 방식으로 개입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사태 평가는 감정 주체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이 평가적 감정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을 좋게 혹은 나쁘게 보도록 만들면서 일종의 쾌락이나 고통을 유발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특정한 관점 형성 혹은 자기 이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내가 나를 부족하고 못난 존재로 믿을 때 벌어지는 사태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볼 때, 수치심은 이러한 자기 평가적 감정의 특징에 더해 어떤 점에서 독특성을 가지는가? 이 자기 평가적 감정은 그 도식적 형태에 있어서 다른 감정들과 어떻게 차이를 보이는가?


 첫째, 수치심은 자신에 대해 부정적 판단을 내리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특정한 종류의 판단과 관계되어 있는데, 특별히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판단이다. 수치심을 경험하는 주체의 자아는 두 개로 분열되는데, 이때 판단을 내리는 자아는 어떤 이상적 기준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판단을 받게 되는 또 다른 자아는 곧 그 기준에 불일치하고 있는 자신의 불완전성 혹은 결함을 자각하게 된다.


즉, 수치심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위나 자신의 자아상을 그가 바람직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가치체계와 비교하면서 그 사이의 불일치 혹은 간극에 의해 발생하는 감정이다. 이때 수치를 느끼는 자아는 드높은 이상이라는 기준 위에 서서 현실적 자아의 결함을 발견하고 열등한 존재가 된 자신을 바라보고, 그 지위를 받아들이고, 고통스러워한다. 정리하자면 수치 감정을 경험하는 주체는 자신에 대한 일련의 판단을 내리되 최종적으로 자신이라는 대상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고통 속에 있게 된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치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정적 가치판단은 단지 그 주체의 특수한 행위나 일부 모습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포괄적인 자아 차원의 판단이다. 수치심의 이런 특징은 특별히 죄책감과 이 감정을 서로 비교하는 사회·임상심리학 분야의 연구들을 통해 선명히 드러났다. 루이스에 따르면, 죄책감과 수치심은 자기 비난의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 둘의 근본적 차이는 각 경험에서 자아의 역할에 있다. 수치심은 그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자아인 반면 죄책감은 그 주체가 행한 특수한 행위에 초점을 둔다. 수치심을 통한 자기 판단의 화살은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전체적인 인격을 향한다. 이때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인격 혹은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그는 너무도 작아지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무능하고 무기력하다는 감각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된다. 마라(Marar)에 따르면, 죄책감은 자신의 양심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기준을 말해주며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여지가 나에게 있다는 것이 확실한 감정이다. 반면, 수치심은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 또는 그러한 기준에 비추어 벌어지는 전반적 평가이므로 개선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감정이다.




  다른 한편 수치심은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주로 관련하는 데, 예컨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수치심을 가지는 사람은 있지만, 죄책감을 가지는 경우는 없다(Marar, 2018/이정민 옮김, 2020: 47, 50). 또한, 수치심을 처음으로 촉발하는 요소는 몸무게, 말솜씨, 용기의 부족함, 봉급 수준, 부정직 등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속성이나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수치심을 느낄 때 결코 그 특수한 속성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치 감정을 유발한 그 문제적 속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어떤 존재인지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즉 수치심은 나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중심적 결함을 드러낼 때 경험하는 감정이다. 이 경험은 한 사람의 자아에 관한 경험이며, 감정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다. 이런 뜻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결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믿음’이라는 포터-애프론과 포터-애프론의 정의는 핵심을 찌른다(Potter-Efron & Potter-Efron, 1999/김성준 옮김, 2016: 12).



  셋째, 수치심을 통한 자기 판단은 그 자체로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다가오며, 그것이 반복될 경우 한 사람의 자기 이해와 관련한 각종 어려움에 처하도록 한다. 실제로 우리가 이런 특색을 자각하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자기 판단을 통해 개인은 점진적으로 부정적인 자기 판단을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과 사회 전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여러 연구들을 통해 입증된 바 있듯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들은 수치심이 자존감(self-esteem) 또는 자기 존중감(self-respect)의 파괴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Tangney & Dearing, 2002: 56-57). 케이른스에 따르면, 수치심은 감정 주체의 자아상의 보호에 관한 감수성을 그 바탕에 둔 감정이다(Cairns, 1993: 2). 수치심이 유독 고통스러운 이유는 특별히 이 감정이 한 인간의 정체성 또는 인생의 의미나 목적의 영역에 손상을 가하기 때문이다. 자아 전체 혹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그 열등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수치심은 비록 일시적인 감정으로 보이지만, 아래 묘사와 같이 때로는 이를 경험하는 주체를 강렬하게 압도할 정도로 매우 고통스럽다.


한 사람의 창조적 움직임이 이같이 잘려 나가면서 ... 일련의 생리적 결과가 뒤따른다. 시선 낮추기, 시선 돌리기, 답답한 가슴, 머리가 꽉 찬 불편한 느낌, 홍조가 심해져서 온몸에 퍼지는 것, 타인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정신 과정의 측면에서는 즉시 뚜렷한 수치심의 느낌(우리 모두 알지만 때때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이 발생한다. 자의식이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사고가 무력화되면서 인지 작용이 흐릿해진다. (우리가 말을 할 만한 나이라면) 적당한 말을 찾기 힘들 수도 있다. 그리고 마음은 그 경험을 강화하면서 ... 심상과 감각과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감정적 멀미로 인해 마음-몸 미로에 갇혀 버린 기분이 들면서, 그 내면적 사태를 멈출 방법을 상상하기가 어려워진다. 보통 이 사태는 우리가 자신을 그 상황에서 구해낼 수 있을 때까지, 그 상황이 지나갈 때까지, 혹은 누군가가 나서서 우리를 위해 개입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Thompson, 2015/김소영 옮김, 2019: 98).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은 때로는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이행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가령 성서의 창세기 4장에서 카인(Cain)은 바로 이런 종류의 고통, 즉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고 가치 없다는 믿음에서 유래한 강렬한 수치심에 휩싸인 나머지 자신의 형제에게 분노하여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치심은 반드시 강렬한 형태로만 자각할 수 있는 감정인 것만도 아니다. 톰슨에 따르면, 수치심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판단은 자신에 대한 비하, 정죄, 업신여김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런 태도의 판단은 굳이 발화된 말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느낌으로 체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굳이 노골적으로 공격적인 톤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 은밀한 자기 판단은 은폐된 형태로 우리 내면을 장악하고 있으며 때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형태로 혹은 장기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기에, 우리는 “맹목의 정교한 울타리”를 만들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수치심이 특별히 자신이 인간으로서 무가치하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말해 인격으로서 실패한 존재임을 부각하는 경험으로 다가올 때, 이는 상대적으로 자신보다는 상황의 어처구니없음에 방점이 있는 당혹감이나 수줍음 등 다른 결을 가지는 수치심들과 비교하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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