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수치스러운 것이다
앞서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수치심은 외적 상황보다는 수치를 경험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내적 역학에 더 방점을 두는 감정으로, 자신에 관한 특정한 믿음을 그 중심에 가지는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본인이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판단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믿음을 통해 수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믿음을 형성하는 판단의 기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준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만드는 어떤 규범적 힘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이 판단의 기준을 수치심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런 자기 평가를 유발하는 원인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수치 감정을 유발한 원인이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수치심은 자기 평가에 따른 자기 주시의 경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감시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감정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해 보면 또 다른 이해가 가능합니다.
수치심을 이해하는 또 다른 접근은 이 감정이 발생하는 원천을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의 외부에서 찾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특별히 타인의 판단 또는 평가에 의해 체감되는 감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수치심은 자신이 은연중에 내면화하고 있는 이상적 기준(standard)과 자신을 서로 비교하면서 깎아내려진 자신의 모습이 실제라고 믿는데서 오는 고통의 감정입니다. 이런 정의는 감정 주체의 내면에 초점을 두고 있지요. 그러나 단지 한 사람의 내면세계에만 집중하면서 “정서의 내적 응축과 이완이 작동하는 심적 세계”(임홍빈, 2016)에 방점을 둔 정의는 그 사람이 내면화하고 있는 이상적 기준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르는 설명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수치심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접근이 있다면, 이 감정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의식하는데에서 나오는 경험으로 파악하는 것에 있습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치심은 나쁜 평가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으로, 이 감정을 자신의 명성 또는 평판을 망가뜨릴 것으로 보이는 악덕들에 대한 일종의 고통이나 혼란함이라고 규정합니다.
누구나 알만한 다른 유명한 사상가들도 수치심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가령 다윈(Charles Darwin)은 우리가 얼굴을 붉히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 또는 타인에 의해 촉발되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주목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보이는 신체의 한 영역이라는 점에 주목하였죠.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수치심은 직립보행을 본성으로 갖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물처럼 네 발로 생활하는 생활패턴을 벗어나 두 발로 걷는 존재가 되는 상태로의 이행은 곧 수치심의 발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직립하고 있는 상태는 인간의 생식기를 가시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수치심은 본능적인 자기 보호적 운동으로서 이해됩니다. 수치심은 인간의 본질적 취약성, 우리가 전적으로 낯선 타인의 타자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전제하는 감정으로, 이런 날 것 그대로의 취약성은 모든 종류의 수치심의 뿌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면 다소 사회학적 맥락에서 수치 감정을 규정한 견해들도 살펴볼까요? 해리스와 마루나(Harris & Maruna)는 수치심을 사회적 불승인에 관한 개인의 인식, 즉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인식의 결과로 규정하며, 린드세이-하르츠(Lindsay-Hartz)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제스처를 취할 때 받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곧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연결 짓는 것으로 수치심을 이해합니다. 한편 로챗(Rochat)은 이 감정이 사회적 거부와 연관된 느낌과 정서의 공적인 표현이라고 정의합니다. 로챗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거부당하는 것, 특별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낙인찍혀 버려짐을 통한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견해들을 살펴보면서 이끌어낼 수 있는 함의가 있다면,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즉 수치심의 본래적 특징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내가 보여지는 것(being seen by another)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이질적인 다른 존재가 나를 주시한다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 낯선 사람이 나를 쳐다볼 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수치 감정, 우리가 일상에서 수시로 느끼는 수줍음과 같은 수치심의 형식 등을 생각해보면, 이 감정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려동물이 곁에 있다고 해서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수치를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공공예절에 어긋나는 복장이나 편한 행동을 하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을 공공장소에서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면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은밀한 생각이나 행동, 또는 나의 어떤 특징을 나와 동류의 존재인 인간, 그것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 나아가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생각하면서 발생하는 것이 수치심입니다.
실제로 전문 연구자들은 수치 경험의 기본적 성격을 다른 사람에 의해 의도치 않게 보이게 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자케(Jacquet)는 수치 경험의 핵심을 노출 또는 폭로에 있다고 하면서, 수치심에는 반드시 관객(audience)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가브리엘 테일러(Gabrielle Taylor)에 따르면 수치심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의 개념에 의존하여 자신을 판단할 때 성립하는 자기의식적 감정(self-conscious emotion)입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는 깨달음은 수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로, 이로 인해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자기 이해 방식의 극적 전환은 이 감정만이 가지는 구조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