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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Oct 23. 2021

박완서,'엄마의 말뚝' 짧게 읽기

문학으로 배우는 첫 심리학 수업

엄마의 삶은 오로지 자식의 출세뿐


  해방이 되기 몇 해 전, 황해도 개풍군 박적골.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 살던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정든 박적골을 떠나기 싫었다. 앵두나무, 배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가 때맞춰 꽃피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시골이 어린 나에게는 낙원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자애도 가르쳐야 해요. 이 아이를 시골뜨기로 자라게 할 수는 없어요. 너, 서울 가서 학교 가야 돼. 학교 나와서 신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엄마는 싫다는 나를 기어코 서울로 데리고 갔다. 엄마는 몇 해 전에 오빠를 먼저 서울로 데려가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서울에 가서 어떻게든 아들의 성공을 이뤄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엄마는 지니고 있었다. 


  엄마에게 박적골은 아픔의 땅이었다. 아버지가 복통을 앓고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때 집안 어른들은 새로 장만한 집에 나쁜 기운이 끼었으니 무당에게 굿을 하자고 했다. 그 당시는 시골 어른들이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조차 낯설어 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결국 복막염이 심해져 돌아가시고 말았다. 엄마는 아버지를 의사에게 보였더라면 충분히 살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엄마는 어떻게든 자식들을 서울로 데려가 교육하고자 했다. 교육받지 못하면 자식들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엄마를 따라온 서울살이는 기대 이하였다. 사대문밖 인왕산 자락의 현저동 상상꼭대기, 그것도 다른 사람 집에 세를 얻어 사는 게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였다. 엄마는 삯바느질을 해가며 오빠를 공부시키고 있었고, 오빠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며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효자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 오빠가 엄마에게는 신앙의 대상과 같았다. 엄마는 오빠가 잠이 들면 머리맡도 지나다니지 않았고, 오빠가 다 쓴 공책도 차곡차곡 모아 신주단지처럼 받들었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을 일으켜야 할 의무를 지닌 오빠를 보며 참 안됐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 당시 현저동 윗동네는 못사는 사람들이 꽤 모여 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엄마가 싫어할 만한 친구와 어울렸고 그 아이를 따라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서 놀았다. 엄마는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 채고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거짓 주소를 만들어 나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입학시켰다. 나쁜 아이들과 섞이지 말라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보낸 돈과 은행에서 빌린 돈을 합해 현저동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이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웃들에게 욕을 했고 그들을 상것, 바닥 상것이라며 아주 나쁘게 말하고는 했다. 딱 한 사람,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냈다는 물장수 아저씨만 빼고 말이다. 


  얼마 후 일본이 망하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해방 후 오빠는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그럴 듯한 집을 장만해서 마침내 엄마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 



오빠를 떠나보내지 못한 엄마


  세월이 수십 년이 흘러 어느덧 나는 중년여성이 되었고 엄마는 여든 여섯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빙판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엄마는 깁스를 하기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한사코 수술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문득 현저동 시절 옛일을 떠올리고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수술을 받겠다고 했다. 그 옛일은 6.25때 죽은 오빠의 지극한 효성에 관한 일이었다. 


  해방이 되기 전, 아직 현저동 꼭대기 집에 살 때였다. 하루는 엄마가 장작더미를 나르다 얼음에 미끄러져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엄마는 가난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 그걸 지켜본 오빠가 어느 노파의 말을 믿고 뼈가 붙는데 효험이 있다는 ‘산골’을 어렵게 구해왔다. 산골은 옛날부터 뼈를 다쳤을 때 민간요법으로 쓰이던 누런 쇠붙이 조각이었다. 엄마는 오빠가 구해온 산골에 큰 감동을 받았고, 손목이 제대로 붙지 않았는데도 산골 덕에 뼈가 더 단단해졌다며 기뻐했다. 그 시절 엄마에게 오빠는 종교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병실에 누워있는 엄마는 수술을 산골로 잘못 알아들었는지 수술을 받겠노라고 했다. 

  수술준비를 서두르던 어느 날, 엄마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놈이 또 왔다. 뭘 하고 있냐? 오빠를 숨겨야지! ······ 군관동지, 여긴 아무도 없어.”

  엄마는 제정신을 잃고 6.25때 북한군에게 사살된 오빠를 떠올렸다. 엄마는 자신의 부러진 다리를 마치 오빠라도 되는 듯이 꼭 붙들더니 미친 듯이 애를 썼다. 오빠를 북한군에게서 숨기려던 그때 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오빠는 피난을 가지 못했다. 해방 후 잠시 좌익에 참여했던 과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빨갱이로 몰리면 큰일이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오빠는 살기 위해 북한군 의용군으로 나섰다. 아마도 북한 세상이 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3개월 후 국군이 서울을 되찾자 오빠는 또다시 북한 의용군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집안에서 숨어 지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국군이 후퇴하고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오빠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그때 생각해낸 게 옛 현저동 집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 숨어 살았다. 그러는 사이 오빠의 정신은 이상해졌고, 심지어 실어증까지 생겼다. 그러다 마침내 오빠는 북한군 군관에게 꼬리가 잡혀 총을 맞고 며칠 후 죽고 말았다. 그런 오빠의 최후를 수술을 앞둔 엄마가 또다시 떠올린 것이었다. 


  엄마가 겨우 제정신이 들 때였다. 엄마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나도, 늬 오빠처럼 보내줘. 네게 몹쓸 짓이지만 꼬옥 그렇게 해줘라. 알겠지?” 

  북한군에게 죽었던 오빠는 묘지가 없었다. 임시로 묻어뒀던 무덤을 파헤쳐 한줌의 가루로 만든 뒤, 고향 개풍군이 보이는 강화도에서 바람에 흩뿌렸다. 엄마는 자신이 죽게 되면 오빠처럼 해달라고 간청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엄마는 여전히 죽은 오빠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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