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 존 볼비
문학으로 배우는 첫 심리학 수업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감상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캐서린이 고아나 다름없는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것도 이해가 안되고, 집요하고 잔인한 히스클리프의 복수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히스클리프. 그를 이해하기 위해 존 볼비의 애착 이론을 적용해본다. 그의 내적 동기를 탐색하는 하나의 열쇠가 되길 바라며.
애착, 안전 기지를 찾아가는 길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처지였지만 상대를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강한 애착을 느끼며 서로를 마음의 안전 기지로 삼았다. 서로에 대한 애착이 외롭고 힘겨운 생활을 견디게 해준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애착을 이론적으로 만든 심리학자 존 볼비와 에인즈워스는 애착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깊은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이들은 동물행동학적인 관점에서 애착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애착이란 미성숙한 아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보다 성숙하고 믿을 만한 존재와 가까이 있으려는 욕구로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이는 생존을 위해 엄마처럼 믿을 만한 존재와 가까이 있도록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행동을 떠올려보라. 갓난아이들은 울거나 옹알이를 하거나, 때로는 사랑스럽게 웃기도 한다. 친숙한 사람이 나타나면 미소를 짓고, 그가 떠나면 떼를 쓰거나 훌쩍인다. 때로 낯선 사람을 마주하면 자지러지게 운다. 별 것 아닌 이 행동들은 볼비의 관점에서 보면 애착의 전략에 해당한다. 이런 행동들을 취하면 적어도 누군가 자기를 돌보러 와준다는 것을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애착이 형성되지 않거나 애착이 불완전하다면 어떨까? 한 가지 오래된 사례를 들어보자. 1940년대 세계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곳곳에 넘쳐나던 시기였다. 갓난아이들은 돌보는 사람이 턱없이 부족한 매우 열악한 보육시설에 맡겨져 방치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갓난아이 특유의 미소를 짓지 않았고, 옹알이도 하지 않았으며 늘 우울한 모습을 띤 채 심지어 울지도 않았다. 전쟁 후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던 아이들도 발견되었다. 나치의 핍박으로 숨어 지내던 유태인 아동들이었다. 이들은 전쟁 후 특수시설에 보내져 보살핌을 받았지만 방안에 있는 가구와 장난감을 망가뜨리고, 심지어 치료센터 직원들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애착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기를 돌봐줄 안전 기지가 없으니 애착 행위를 할 이유가 없었고, 아무도 자기를 지켜주지 않으니 불안과 공포가 증폭되어 스스로를 지키려고 난폭해졌던 것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는 고아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애착을 느낄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히스클리프는 처음에는 매우 방어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다행히 그는 폭풍의 언덕에 온 이후로 그를 돌봐주는 언쇼 어른이 있었고 비슷한 또래의 캐서린이 있었다. 그들이 히스클리프에게 애착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특히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할 안식처와도 같았다. 언쇼 어른이 돌아가시고, 힌들리의 학대가 시작되었을 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것은 캐서린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연이어 돌아가시고 망나니 같은 오빠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를 정신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애착이 폭력을 부른다
캐서린이 애드거와 결혼한 것은 히스클리프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에게 캐서린은 연인을 넘어서 강렬한 애착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도 없이 천한 취급을 받았던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은 삶의 전부였다. 그런 애착의 대상이 사라지는 걸 히스클리프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애착은 단순히 어린 시절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청소년기, 성인기에도 애착은 이어진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부모 못지않게 또래 친구들과의 애착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가 높은 청소년기에는 새롭고 강렬한 애착의 대상을 갈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또래 친구들이다. 이제 친구는 단순한 놀이의 상대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유대감을 제공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그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았던 히스클리프. 그에게 캐서린은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정신의 동반자였다. 이런 애착의 상대가 힌들리와 애드거로 인해 불안정해지고 말았다.
애착이 불안정해진다는 것은, 마음속에 존재하던 안전기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자기를 부정하거나, 타인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둘 다 부정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마치 전쟁 고아들처럼 타인을 적대적이고 폭력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불안정한 애착에 빠진 히스클리프의 선택은 불 보듯 뻔했다. 복수의 화신이 되어 한 명씩 잔인하게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불안정한 애착은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여전히 사랑했다. 만약 그가 캐서린에게 더 이상 애착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는 폭풍의 언덕을 영원히 떠났을 것이고 성공한 사업가로 제 2의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다. 불안정한 애착을 지닌 채.
불안정한 애착은 폭력적인 성향 못지않게 애착의 대상에 대해 집착을 유발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라. 혹시 어머니와 떨어지는 게 죽도록 싫었던 적이 있었다면 그게 바로 불안정한 애착이 형성된 경우다. 애착이 잘 형성된 아이들은 엄마가 곁에서 사라져도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엄마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반복되면 아이는 엄마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생긴다. 엄마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도 똑같았다. 캐서린이 자기 곁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에게 병적인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힌들리를 파멸시키고, 그 자식을 종처럼 부렸다. 그의 모든 행위들은 캐서린과의 사이에 걸림돌이 되었거나, 걸림돌이 될 사람들을 응징하는 일이었다. 히스클리프는 그러고도 모자라 캐서린이 남긴 딸 캐시마저 강제로 자기 며느리로 삼아서 폭풍의 언덕에 감금까지 한다. 딸을 통해서라도 캐서린을 붙잡아 두려는 병적인 집착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최후를 보라. 캐서린의 유령을 쫓다가 숨을 거두지 않았나?
폭력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혹시 평소에 들끓는 복수나 폭력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욕구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애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실제 사이코패스를 포함한 폭행범들은 유년시절 정상적인 애착이 형성된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애착의 대상이 없었거나 혹은 애착이 불안정하게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나는 홀로다’,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누구나 언제든 내 곁을 떠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마음들이 불안과 초조, 폭력을 부른다. 또한 제대로 사랑하고 공감하는 법을 익힌 적이 없으니 범죄를 저지르고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랑할 대상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 못지않게, 스스로 사랑하는 것도 애착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가 삶을 실패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할 대상을 다시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캐서린 이외에 이사벨라도 있었고, 아들 린튼, 캐서린의 딸 캐시까지. 하지만 그는 모든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하루 빨리 애착의 대상을 찾는 일이다.
오래 묵혀놓은 묵정밭을 가꾸려고 잡초만 뽑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잡초는 아무리 뽑아도 또다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보다 좋은 씨앗을 뿌려서 그것들이 싹을 틔우게 돌보고 잘 자라도록 아껴준다면 잡초는 천천히 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폭력은 사랑으로 사라진다.
아주 오래된 영화 한 편 소개한다. 「레옹」. 영화 속 주인공 살인청부업자가 숙소를 옮겨 다니며 반드시 가지고 다니는 게 있다. 바로 화분이다. 냉혹한 살인마가 왜 화분을 가지고 다닐까? 그건 보잘것없는 화초라도 자신의 애착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사랑이라도 살아갈 이유로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