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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Nov 18. 2024

버림받은 유기견처럼 불안한...

경계선 성격장애

누구나 친구가 필요해?     

   한 중년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그레타. 그녀는 지하철에 명품 가방을 두고 내립니다. 그 안에 일부러 집 주소를 남겨둔 채 말이죠. 그럼 어느 선량한 사람이 주인을 잃어버린 가방을 들고 그녀를 찾아가겠죠. 남이 처한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여린 사람일 것입니다. 

  그레타는 가방을 들고 찾아온 선량한 20대 소녀를 살뜰하게 대합니다. 고맙다는 인사치레는 물론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함인지 프랑스로 유학 간 딸과 먼저 세상을 등진 남편 이야기까지 꺼내며 지금은 홀로 지낸다고 털어놓지요. 가방을 주워온 20대 소녀, 프랜시스는 얼마 전 엄마를 잃고 상심해 있던 까닭에 홀로 지내는 그레타가 엄마처럼 친밀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어느날 프랜시스는 그레타의 집에 초대되어 음식을 만들어 먹고 친밀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우연히 프랜시스는 자신이 지하철에서 주웠던 가방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 챈 프랜시스는 그레타의 애타는 만류에도 서둘러 그녀를 떠납니다. 

  문제는 이때부터입니다. 그레타는 프랜시스에게 집요하게 연락합니다. 전처럼 다정하게 지내자며 프랜시스에게 애걸하죠. 하지만 프랜시스는 무시합니다. 그러자 그레타는 프랜시스의 동선을 파악해서 문자를 보내고, 그녀의 직장 앞에 하루 종일 우두커니 서 있고, 심지어 직장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립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프랜시스를 납치해 집에 감금합니다. 이때부터 그레타는 프랜시스를 마치 자기 인형이라도 되는 듯 다룹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필요해.”라고.      


혼자는 견딜 수 없어     

  영화 ‘마담, 사이코’는 제목처럼 사이코패스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레타는 반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죠. 선량한 이들을 꼬드겨 이들을 억압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살해도 불사하니까요. 그런데 그녀가 이런 일을 벌이는 까닭에는 경계선 성격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그레타는 프랜시스가 그녀를 떠나기 전까지 한없이 다정해 보였습니다. 마치 엄마처럼 세심하게 그레타를 대해 주었죠. 어쩌면 그레타는 프랜시스가 자기 뜻대로 해주었다면, 여전히 다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레타의 폭주는 프랜시스가 떠나면서 시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필요해” 이 말은 그레타가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죠. 바로 경계선 성격을 지닌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거부당해서 혼자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몰라도 거부를 당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이자 공포로 느낀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를 피하고자 극도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스토킹을 일삼거나 상대를 붙잡아두기 위해 자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레타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버림받지 않으려는, 혼자서 고립되지 않으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한 천재가 있었습니다. 대학교수도 쩔쩔매는 수학적 증명을 단 몇 시간만에 해결하는 그런 천재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명문대학생이 아니라 명문대학에서 청소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빈민 청년이었죠. 게다가 어릴 때부터 절도, 폭행을 반복하고 최근에 다시 폭행을 저질러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엄청난 기회가 찾아옵니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 메달을 수상한 대학교수의 눈에 띄어 교도소가 아니라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교수와 함께 고등수학을 연구하고 각종 연구소와 정부 기관에 면접을 치를 기회까지 얻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런 시건방진 친구가 있을까요? 이 친구는 교수가 마련한 연구소 면접을 장난처럼 여기며 자신을 지지해주는 교수를 골탕 먹이기 일쑤죠. 그뿐이 아닙니다. 카페에서 만난 미모의 하버드 학생, 스카일라와 진지하게 사귀게 되어 캘리포니아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받지만 그런 순수한 사랑마저 거부합니다. 그녀가 엄청난 상속녀인데도 말이죠. 빈민가를 벗어날 절호의 찬스를 스스로 망가뜨린 것입니다. 

  영화 ‘굿윌헌팅’의 윌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이런 엄청난 기회를 날려버리는 걸까요? 인생역전의 기회인데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윌 역시 불안이 높았습니다. 그가 빈민가를 떠나려 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에는 그를 한결같이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민가 친구들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기에, 그보다도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워서 그곳을 절대 떠날 수 없고, 늘 한결같이 살 수밖에 없어서, 윌 자신만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면 항상 함께할 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찾아온 꿈같은 기회를 흘려보낸 것입니다. 그레타가 20대 소녀에게 집착하듯이 윌은 변하지 않을 친구들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왜요?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고립과 그로 인한 불안 때문이죠. 아무리 천재라도 홀로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떠나지 않을 사람만 믿을 수 있어     

  그런데 이상합니다. 어째서 이들은 홀로 있는 것을 그토록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요? 과거의 인연을 끊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말입니다. 어째서 그레타는 감옥 같은 폐쇄된 곳에 딸같은 소녀를 감금하려 하고, 윌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빈민촌을 벗어나지 않는 걸까요? 해답은 유년시절에 있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경계선 성격이 형성되는 까닭을 주로 영유아기에서 찾습니다. 이 시절 가장 사랑을 베풀어줄 사람들, 이를테면 부모에게 정서적 학대에 노출되거나 버림을 받을 경우, 일종의 트라우마적 경험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버림받을 거라는 공포가 내면화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윌의 폭행죄를 심리하는 재판관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자네의 전과 기록을 살펴봤는데 놀랍더군. 1993년 6월, 폭행죄 입건, 1993년 9월 또 폭행죄, ······ 1995년 1월에는 경관 사칭죄, 상해, 절도, 체포 불응죄 모두 기각을 받아냈어. 물론 피고가 몇 번이나 입양됐다 파양됐고 그중 세 번은 학대로 인한 강제 파양이란 거 아네.      

  윌은 고아였습니다. 입양과 파양을 몇 번씩 반복했고, 그중 세 번은 학대로 인한 강제 파양을 겪었습니다. 가장 믿어야 할 사람에게 버림받았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 이유도 폭행에 의한 것이어서 어린 시절 윌은 자기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윌은 자신을 언제 어느 때든 쉽게 버림받을 수 있는 존재, 아무 때나 맞아도 되는, 언제든 폭행당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고 일상을 공포의 가시밭길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아픔은 반복된다고 해서 무뎌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늘 한결같이 자기 주변에 머물러 있는 존재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빈민가에서 미래가 없이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어느 대상보다 강렬한 집착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경계선 성격은 어린 시절 유기되거나 학대당했던 경험으로 인해 언제든 버려져 홀로 될 거라는 불안을 지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강렬한 집착이 형성된 것입니다.      


분열된 내면참을 수 없는 분노     

  경계선 성격의 또 다른 특징은 이들이 분노 조절을 잘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윌은 스카일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윌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 자기를 돕고 싶다는 말에 갑자기 버럭 화를 내고 결국 결별하고 맙니다.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경계선 성격은 상대가 자기 뜻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분노를 표출합니다. ‘마담 사이코’의 그레타는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던 소녀가 그녀의 실체를 눈치채고 반항하자 완전히 태도를 바꿔 소녀를 좁디좁은 장난감 상자에 가둬 버립니다. 또 손발을 묶은 채 욕조에 빠뜨리고 그도 모자라 지하실에 감금한 채 살해를 일삼습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했던 ‘더 팬’에서는 야구선수를 좋아하던 한 사생팬이 자기 뜻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선수의 아들을 납치해서 감금해 버리기까지 하죠. 이밖에 일일 연속극이나 아침 드라마에서 단골로 다루는 치정의 서사물에는 분노 조절을 못하는 캐릭터들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들도 경계선 성격 유형에 매우 가깝습니다.

  이처럼 경계선 성격은 뜨거웠다가 갑자기 차가워지고, 맹렬히 좋아했다가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그러다 죄책감이 들면 자기를 비난하고, 자책하고, 비굴할 만큼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다가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자해를 시도하기도 하죠. 자기혐오에 빠져 일순간 모든 것을 끝내려는 시도도 나타납니다. 몹시 충동적이어서 언제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하기 어렵지요. 

  이런 행동들은 그들의 내면이 철저히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사람이란 좋은 면도 있고 안 좋은 면도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좋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나쁜 존재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상대를 이상화하거나 형편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니 자신이 좋다고 여겼던 사람이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이면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를 터뜨리죠. 타인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에 이들의 상처는 너무 컸던 것입니다. 

  윌의 상황을 떠올려 볼까요? 그는 입양과 파양을 거듭했습니다. 아마도 입양과정에서 양부모들은 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얼마 못 가 폭행을 하고 파양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반복해서 겪는다면 어떨까요? 버려진 개들처럼 사람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경계심만 잔뜩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흠결도 없는 사람만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고, 조금이라도 예상과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면 신뢰는 깨지고 엄청난 분노가 폭발할 것입니다. 내면이 분열되어 있기에 그들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내면이 분열된 사람이 제대로 된 자아상을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가장 사랑받아야 할 사람으로부터 버려졌으니 이들은 스스로를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자기혐오에 빠져 자신을 정서적으로 학대할 것입니다. 어린 시절 꾸준히 칭찬과 사랑, 인정을 받은 사람은 긍정적인 자기 가치감이 발달하지만, 학대와 방임, 일관되지 못한 양육환경에 노출되면 자기가치감이 손상되고 부정적인 자기 가치감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겠죠. 

  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윌은 자기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아주 수준 낮은 존재라고 여기고 있죠. 그래서 타인에게 극도로 방어적입니다. 스스로 허점이 많다고 여기니 거친 행동과 말투로 자기를 지킬 뿐이죠. 폭행과 폭언,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모두 그 결과물입니다. 그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지만 자기방어를 위해 온갖 지식을 동원해서 상대를 공격할 뿐, 실상은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윌에게 숀이 등장합니다. 숀은 윌의 마지막 상담자였습니다. 그는 윌이 책에서 얻은 온갖 지식으로 자기방어를 일삼자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난 그런 개소리 상관없어. 어차피 너한테 들은 게 없으니까. 엿 같은 책에서 뭐라 나불대건 상관없다고. 네가 스스로 너에 대해 말해야 돼네가 누군지. 그렇게 하면 나도 관심을 갖고 널 대해 줄게. 근데 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 너 스스로 무슨 말을 할지를 겁내니까.     

  윌은 셰익스피어와 니체를 읽고, 남북 전쟁 시기에 미국 경제의 특징을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면서 유기화학의 분자식과 스펙트럼을 단번에 작성할 능력을 지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자신이 누군지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제대로 된 자아상이 형성되지 못한, 숀의 말에 따르면 ‘단지 어린애’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윌에게는 과거의 자아도, 미래의 자아도 있을 까닭이 없겠죠. 숀은 상담을 하며 윌에게 묻습니다. 어째서 청소부를 직업으로 선택했느냐고, 그것도 하필이면 다른 곳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공과대학에서 청소부 역할을 하느냐고, 왜 밤마다 돌아다니며 세계에서 한두 명이 풀까 말까 한 문제를 풀어놓고 거짓말을 하느냐고.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윌,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뭐야?”

  세상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에 곧장 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윌처럼 대답하지는 않겠지요. 그는 머뭇거리다 말합니다. 

  “양치기가 되고 싶네요.”라고. 

  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르는 “단지 어린애”인 것이죠. 이처럼 경계선 성격은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존재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자아상 때문에 현실과 불화하고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며 세상 모든 걸 안 좋게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경계선 성격은 유년 시절 일관되지 못한 양육과 폭행, 혹은 유기가 원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사회는 갈등과 경쟁이 심해서 일관된 양육환경을 마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혼율이 높아가고, 양육권을 포기하는 사례마저 증가하는 현실에서 성격적 문제가 줄어들 여지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각종 서사물에도 이런 소재들이 더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이런 까닭일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경계선 성격이 치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 속에는 경계선 성격에 대응할 단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상담자 숀을 주목해야겠죠. 그는 남들이 모두 거절한 윌을 상담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치료라든가, 도움과 같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왜 중요한지는 윌이 스카일라에게 화를 낸 순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윌은 스카일라가 자기를 ‘돕고 싶다’는 말에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돕고 싶다고?! 무슨 소리야. 네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어?”

  “아니야.”

  “내가 불쌍해 보여?” 

  “아니야.” 

  “너를 사랑하니까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헛소리 집어치워!”


  윌은 스카일라를 몰아붙이고는 벽을 내리치며 분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를 사랑하고 돕고 싶다는 사람에게 말이죠. 까닭은 도움과 치료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 그래도 자존감이 바닥인 존재가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얼마나 가슴이 고통스러울까요? 아무리 상대가 선의로 다가온다 해도 도움이나 치료의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것 역시 경계선 성격장애자의 상처를 자극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경계선 성격의 전문가 피터 포나기는 이들이 피부가 벗겨진 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섣불리 도움을 주겠다고, 치료해주겠다고 손을 내밀거나 안아주는 것은 이들의 찢어진 피부를 만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도와주겠다고 하기보다는 찢어진 정신의 피부가 아물 때까지 울타리가 되어주는 게 현명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지지해주면서 말이죠.

  상담자 숀은 윌을 치료하거나 도움을 줘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윌을 서둘러 치료해달라고, 그래서 성공하게 도우라고 몰아세우는 대학교수에게 이렇게 말하죠. 

  “그 아이는 좋은 아이라고! 자네가 지금처럼 그 애를 몰아대게 놔두지 않겠어! 실패자처럼 느끼게 하지도 않겠어!”라고. 

  숀은 윌의 울타리를 자처한 것입니다. 윌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고, 일관된 반응으로 ‘너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고, 단지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 한마디를 마침내 덧붙입니다. 네가 버림받았던 것, 학대받았던 것, 피부가 사정없이 찢긴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그토록 윌이 듣고 싶던 말. 마음속으로는 늘 생각했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 이 말을 드디어 누군가 들려주자, 윌은 오랫동안 자신을 왜곡해왔던 시선에서 벗어나 비로소 해방감을 느낄 수가 있었죠. 그러니 경계선 성격을 지닌 이들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숀이 윌에게 외쳤던 것처럼, “It’s not your fault”라고 말해주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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