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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Apr 25. 2023

일단 그냥 킥!

싸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11

로우킥(low kick)을 배우던 날이었다. 발등을 길게 뻗어서 정강이와 발등으로 상대방을 가격하는 동작인데, 오른발로 해도 어색하고 왼발은 더 이상했다. 발등을 늘여서 정강이부터 발가락 끝까지 일자로 만드는 건 무용할 때 "발끝 포인(pointe)~"을 수없이 들어서 익숙했다. 상체는 허둥거려도 하체 근력은 자신 있는 편이니 킥도 잘하겠거니 자만하고 있었다.


하지만, 뭐 하나 만만한 게 없다. 있는 힘껏 발차기를 하는 동시에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발등이고 발끝이고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내 나름대로는 위협적으로 세게 찬다고 찼는데, 나중에 영상을 보니 옹졸하고 가볍게 톡! 건드리고 오는 수준이다.


"그냥... 존~나 쎄게 차보세요!!"

보다 못한 코치님의 한마디에 프하! 웃음이 터졌다. 속이 시원해지면서 복잡했던 머리도 싹 비워지는 기분!


그러게,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격투기를 왜 배우려고 하는 거지? 교과서에 실릴 법한 바른 자세를 연구하는 게 아니잖아?! '오른발로 킥을 할 때는, 먼저 왼쪽 발을 살짝 바깥으로 틀어서 준비하고, 발만 들이미는 게 아니라 골반이 회전되는 힘을 이용해서, 정강이랑 발등으로, 아! 발등은 죽 펴고 코어는 당연히 힘주고...' 조각조각 따로 떼내어 생각하면서 또 몸보다 머리를 더 쓰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질까봐 초보자한테는 너무 자세한 설명은 안 하려고 하신다는데, 내가 딱 그랬다. 그 뒤론 속으로 킥킥 웃으면서 '존나 쎄게. 존나 쎄게!'만 되뇌었더니 폼은 모르겠고 힘은 확실히 더 실렸다!


생각이 단순해지니 몸도 가벼워지는구나.




언어든 요리든 뭔가 배우고 싶으면 일단 학원을 알아보고, 책부터 사고, 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석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한 성향은 운동할 때도 여전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확 해버리는 게 필요하다는 코치님의 지적은 사실 나에겐 익숙하다. 살면서 여러 선생님들한테 일관되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무용 학원에서는 '속에 뭔가 꽉 차있긴 한데, 확 폭발하질 못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상체가 뻣뻣하고, 감정이 몸으로 잘 표현이 되지 않는다며. 운전면허 학원에서도 마찬가지. 차를 10년 넘게 운전했으면 뭐 하나. 모터 사이클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어느 정도 속도가 붙어야 바이크가 앞으로 움직이고 그 엔진 힘으로 넘어지지도 않는건데, 나는 겁이 나서 쓰로틀(throttle, 차로 말하자면 엑셀)을 제대로 당기질 못했다. 찔끔찔끔 움직이다 멈추길 반복하면서 이리저리 기우뚱대는 바이크를 붙잡아 세우느라 팔만 아팠다. 딱히 가르쳐주는 것도 없던 무뚝뚝한 선생님이 "알을 깨고 나와야 해요." 툭 던지신 한 마디가 뭉클하기까지 했었지.




기꺼이 실수하고 기꺼이 틀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가보다. '생각만 하지 말고 몸으로 부딪혀보기. 실수해도 괜찮고 틀려도 괜찮으니 일단 그냥 해보기' 이런 다짐을 40대가 되어서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나이가 들수록 '일단 몸으로 부딪혀보자'는 마음먹기가 더더욱 어렵다. 이제는 좀 덜 실수하고 싶고, 덜 실패하고 싶지. 이제는 좀 더 능숙하고 더 여유롭게 살고 싶지.


그러니 매트 위에서는 기꺼이 비틀거리자. 생각은 밖에서도 충분히 하고 사니까 체육관 안에서는 머리를 가볍게 비워보자. 몸을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면서 매트 위에 나를 마음껏 풀어놓자. 그러다보면 체육관 밖의 삶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더 단순하게, 더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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