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흐름 Apr 13. 2023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맛

싸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10

복싱을 배우러 갔는데 한 달 동안 줄넘기만 했다거나, 수영을 배우러 갔는데 키판 잡고 음파음파만 몇 주 동안 했다는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운동을 하든 기초 체력을 끌어올리고 기본자세를 처음부터 몸에 잘 익히는 게 중요하지만, 전문 선수가 되려는 게 아니라 취미로 운동을 하는 일반인은 진도를 빨리 빼줘서 흥미를 붙이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 체육관은 간단한 워밍업 후에는 매주 새로운 동작을 배우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대신 다양한 동작들이 더해지고 곱해져서 콤비네이션이 점점 복잡해진다. 늘 새로워. 짜릿해...


원투원투 주먹만 뻗다가 훅! 어퍼컷! 같은 동작이 추가되고 더킹! 위빙! 방어도 중간중간 해야 하면 어? 다음에 뭐더라? 머리가 하얘진다. 얼음땡 하는 아이들처럼 얼어붙어서 몇 초를 가만히 서 있기 일쑤. 순서를 곱씹어보는 동안 앞에서는 코치님이 미트를 들고 기다리신다.


이거 다음에 이거, 그다음에 이거… 차근차근 외워보다가 마음이 급해져서 나도 모르게 "에라 모르겠다!" 소리 지르고 준비 자세를 잡는다. 일단 부딪혀보자 싶어서 첫 번째 동작부터 시작하고 나니까 그다음은 머리로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엉킨 실타래가 스르르 풀리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오?! 몸이... 저절로 움직였어...!


신기하다. 몇 번 반복해서 연습하는 동안 몸이 기억했네!




몸 쓰는 일은 몸으로 익혀야 한다. 어렸을 때 학교 축제나 회사 체육 대회에서 춤 공연을 몇 번 해본 적이 있는데 <연습을 실전처럼>이라는 말은 진리였다. 딱 연습한 만큼 몸이 움직여진다. 아니, 보는 눈도 많고 단 한 번의 무대라는 긴장감 때문에 연습할 때보다 더 못하기 마련이다. 안무 순서와 동작을 무대 위에서 생각해서 움직여야 할 정도면 연습이 한참 덜 된거다. 음악이 나오면 몸이 저절로 움직여질 정도로 충분히 연습해 두고, 강조해야 할 동작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연습해 둬야 그나마 자연스럽다.


말하는 일은 입으로 익혀야 한다. 강의를 하거나 워크숍을 진행할 때도 '현장 분위기에 따라 어떻게든 되겠지.' 마음 놓고 있다가는 큰일 난다. (말하는 걸 좋아하거나 사람들 앞에 서서 주목받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닌 내성적인 강사인 나는 더 그렇다.) 그렇다고 대본을 꼼꼼하게 써두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외워서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오히려 흐름을 놓치기 쉽다. 연습할 때처럼 준비한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돌발 상황은 꼭 생기기 마련이라 대본을 달달 외워뒀다가는 한 부분만 삐끗해도 당황해서 전체가 흔들린다.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떤 흐름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지, 어떤 말을 강조해야 할지, 어떻게 마무리를 할지 뼈대를 세워두고 중요한 단어만 적어둔 상태에서 소리 내어 말하면서 연습해야 한다. 눈으로 읽고 생각만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실전처럼 입으로 뱉어내면서 듣기에 어색한 문장이 아닌지 확인하고, 목소리 높낮이와 속도도 다듬으면서 입에 붙을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 녹음하거나 영상을 찍어서 모니터링하는 건 필수.




이런 논리를 적용하자면 인간 관계도 사람들 틈에서 부대낄수록 익숙해질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도 마찬가지. 어느 정도는 할수록 늘긴 하겠지만 이제 좀 일하기 편해졌다 싶으면 꼭 사건 사고가 생기고 새롭게 도전할 과제가 닥친다.


몸만큼 정직하고 안심되는 게 있을까. 정성 들여 움직인 만큼 달라지고, 방치한 만큼 무너지는 게 몸이니 다들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도 매일같이 달리기를 하고, 덤벨을 들고, 춤을 추고, 요가 매트 위에 서나 보다.


몸으로 돌아오는 건 좋지만, 몸으로 도피하는 건 경계하고 싶다. 괴로운 현실을 잊고 싶어서 발레를 하고, 우울의 늪에 빠지기 싫어서 현대 무용을 하고... 잠시도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아서 아침부터 밤까지 무용으로만 일상을 꽉 채웠던 적도 있다. 몸에만 몰입하는 시간과 음악과 하나 되어 감정을 표출했던 시간 덕분에 숨 쉴 수 있었던 건 맞지만, 직면해야 할 감정과 챙겨야 할 일상을 나 몰라라 하고 몸이 회복할 틈도 주지 않아서 생긴 부작용도 충분히 겪었다. 마음이 힘들다고 몸을 심하게 혹사시키는 것은 잠깐은 진통제 같아 보이지만 견고하지 않은 저수지의 둑과 같아서 고통을 잠시 뒤로 미뤄둘 뿐이다. 어쩌면 더 위태롭게.


그래서, 즐겁게 도전하면서 수련하는 것과 괴롭게 집착하면서 몸을 혹사시키는 것과의 흐릿한 경계를 잘 구분해야 하는 것 같다. 물론, 이제 나는 혹사는커녕 '이만하면 오늘은 됐다~' 너무나도 나 자신과 타협을 잘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이렇게 글을 쓸 시간에 연습을 더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찔리긴 하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오글거리는 쉐도우 복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