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09
“이제 마음대로 한 번 해보세요”
“네?!!”
마치 앞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혼자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는 쉐도우 복싱. 영화에서 주인공이 해변을 달리거나 계단을 오르면서 쉭쉭! 멋있게 움직이는 장면을 보긴 했지만, 정작 내가 하려니 부끄러워 죽겠다. 글러브를 끼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도 어색하고 "원, 투, 훅!" 구령에 맞게 동작을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내 마음대로 동작을 해보라니! 지금까지 내가 움직임 워크숍을 이끌 때 눈 감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보라고 말할 때마다 쭈뼛쭈뼛 난감해하던 사람들이 너무나도 이해가 됐다.
무용을 배울 땐 즉흥을 제일 좋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 이 부분에선 즉흥으로 아무거나 해봐!"라는 선생님의 주문에 난감해하고, 부끄러워하고, 얼어붙었지만, 나는 즉흥이 늘 반가웠다. 어려운 동작을 멋있게 뽐내려고 하면야 어렵지만, 몸이 허락하는 만큼 움직여도 되고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마음껏 젖어있어도 되는 게 좋았다. 눈을 감으면 훨씬 더 내 몸과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쳐다보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10분, 20분, 30분도 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쉐도우 복싱은 왜 이렇게 어색할까?! 동작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눈앞에 사람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상상하면서 움직여야 해서 더 그런 것 같다. 누가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재빠르게 몸을 숙여 피했다가 힘껏 주먹을 뻗기도 하고 발차기도 하는데 사실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서 표정은 또 엄청 진지하다. (진지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 뭐 하지? 생각하느라 ㅎㅎ;) 그동안 배웠던 거 몇 번씩 다 훑고 나면 갑자기 현타가 와서 피식 웃음이 나오고 몸은 다시 얼어붙는다. "으으~~ 오글거려요~ 못하겠어요~" 징징대봤자 "어어! 아직 시간 남았어요. 고고고!" 코치님은 봐주시지 않는다.
살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나이가 들수록, 맡은 책임이 많을수록 점점 더 적어지겠지. 내 마음처럼 움직여주는 타인을 만나기는 더 쉽지 않은 일.
그러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움직여도 되는 쉐도우 복싱을 즐겨보기로 한다. ‘이제 이 사람이 내 왼쪽으로 주먹을 날릴 거야. 그럼, 난 이렇게 슉~ 피하면 되고, 그다음에 얼른 비어있는 저 쪽으로 강하게 훅!!’ ‘쉐도우 땐 언제나 내가 이기지, 훗훗’
‘언제 끝나나…’ 타이머만 바라보던 3분이 이제는 아깝게 느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