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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May 31. 2023

시합 첫 관람기

싸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14

얼마 전 열린 종합격투기 아마추어 대회에 우리 체육관에서도 네 분이 출전했다. 체육관은 MMA PT가 전문이지만 선수부 수업도 따로 있어서 퇴근 후나 주말에 특훈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우리 부부는 2:1 PT만 하고 있으면서도 선수부를 동경하는 마음이 커서 사진과 영상 일을 하는 남편이 훈련하는 모습을 촬영해드리기도 하고 회식에도 놀러 가곤 했다. 그렇게 한두 번 얼굴만 봤으면 다시 만날 때마다 데면데면했을 텐데, SNS의 힘이란! 인스타그램으로 서로의 일상을 매일같이 보다 보니 가끔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내적 친밀감이 높다.


선수부 수업의 강도 높은 워밍업과 진지한 스파링 연습만 봐도 남편과 나는 이미 기가 죽어서 "우린... 우리 둘이서 살살 잘해보자." 다짐하곤 했는데, 시합이라니! 본업을 하는 틈틈이 짬 내서 연습하고 다이어트로 몸을 만들어 가는 준비 과정만으로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랑 승패를 걸고 맞붙는 진짜 시합이라니!! 나는 UFC 경기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서로 격하게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영 불편했다. 누군가 코피라도 터지면, 그리고 피가 흐르는데도 계속 맞고 있으면 "으으. 잔인해." 꺼버리기 일쑤. 그래서, "오, 시합! 응원 갈게요!" 해놓고도 신나는 마음 반, 눈앞에서 보고 질려서 운동도 그만하고 싶어지면 어쩌나 걱정되는 마음 반이긴 했다.




기분 좋게 화창하던 토요일 낮. 안성에 있는 시합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압도돼버렸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문 앞에 늘어선 신발, 바글바글 모여 앉은 사람들, 원형의 시커먼 쇠창살 케이지(는 아니고, 링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막아주고 충격을 흡수해 주는 안전장치지만 처음 봤을 땐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케이지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 컸다), 팡! 팡! 미트를 치거나 우당탕탕 몸을 굴리면서 기세 좋게 몸을 푸는 사람들, 현장을 중계하는 카메라들... 남편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무서워..." "내... 무습따.(진양철 회장님 ver.)"만 반복했다.


'와, 살벌하네. 친목 경기 같은 느슨한 분위기가 아니네.'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되고, 세상 진지한 두 사람의 눈빛과 투다닥! 탁탁탁! 온 힘으로 공격을 주고받는 소리에 몸이 더 얼어붙었다. 두 번째였나 세 번째 경기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케이지로 몸이 밀려 주저앉은 사람이 왼팔을 움직이지 못하면서 순식간에 경기가 끝났고, 구경하던 우리는 더 얼어버렸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 시간이 다 가도록 이렇다 할 공격도 없이 서로 노려보기만 하면서 링 위를 왔다 갔다 하는 팀을 보면서는 '아, 쫌! 누구든 뭐라도 확 해봐!' 하는 마음이 들어서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나한테 이런 공격성이 있었다니. (UFC 경기도 잘 못 본다는 위의 고백은 취소.)




그렇게 점점 경기장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수다도 떨고 웃기도 하다가 우리 체육관 선수들 차례가 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응원하러 간 사람들이 다 우르르 일어나 모여 서서 소리소리 질렀다. 우리 팀 선수가 기세 좋게 공격을 하고 있으면 "와아아아!! 잘한다아아!!"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댔고, 우리 팀이 밀리고 있으면 "화이티이이잉!!!" 목 아프게 소리를 질러댔다. 평소에 운동 경기를 즐겨 보거나 응원하는 팀이 있질 않아서 이렇게 간절하게 이기길 바란 게 언제였는지, 이렇게 방방 뛰고 소리 지르면서 온몸으로 응원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응원하던 사람이 이기면 내가 이긴 것처럼 뿌듯하면서 홀가분했고, 응원하던 사람이 지면 '열심히 준비했는데, 얼마나 속 상할까.' 마음이 쓰렸다.


지금껏 승패가 명확한 세상에서 살아오질 않았어서 경기가 끝나고 심판이 이긴 사람 손을 들어주고 트로피를 쥐어주는 장면이 참 낯설었다. 이기고 지는 게 너무나도 선명한 상황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승부욕이라곤 없고, 승부를 겨뤄야 하는 상황이면 있던 의욕도 싹 사라지면서 '응, 너 이겨.' 무심하게 물러나버리던 나였다.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면서 사람마다 다른 자기 고유의 개성을 존중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일의 성과보다 일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이기고 지는 게 뭘까 마음 한 구석이 내내 불편했는데, 그날 밤 인스타그램에서 서로 축하와 격려를 나누는 따뜻한 댓글을 보며 마음이 좀 편해졌다.


Win or Learn!


특히 이 말에 마음이 쿵 울렸다. 그러게, 시합이 끝나고 남은 건 승패만은 아니었다. 처음 시합을 준비하고 링 위에 서면서 느꼈을 오만 감정, 오랜만에 시합을 준비하면서 마주했을 과거의 이겼던 혹은 졌던 경험, 10Kg 가까이 감량하기 위해 이겨냈을 숱한 유혹, 공격하고 방어하는 기술을 몸에 익히느라 땀 흘리며 연습해 온 시간, 취미로 하던 사람들을 선수부로 훈련시키고 우리 체육관 소속으로 처음 출전시켜 본 마음, 링 밖에서 내 일처럼 마음 졸이며 응원하던 간절함, 경기가 끝나고 상대 선수 입에 먼저 물을 대주던 코치들의 훈훈함, 링에서 내려와 이겼든 졌든 상대방한테 달려가 "많이 배웠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던 겸손함이 링 안팎에 뒤섞여 있었다.


벅차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는 하나의 단어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응축된 마음이 링 위에서 뛴 사람과 링 아래에서 응원한 사람 모두에게 진하게 각인되었나 보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사람들은 오늘도 글러브를 끼고, 달리기를 하고, 매트 위를 구른다. 늘 그래온 것처럼. 조금 더 짙어진 마음으로.





덧. 처음으로 코 앞에서 시합을 보고 와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변화 1. 격투기 경기라고 하면 '잔인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무자비하게 때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2~3분 동안 온 신경을 바짝 세워 서로 탐색하고, 공격하고, 방어하고, 전력을 다해 엎치락뒤치락하는 팽팽한 에너지는 보는 사람 몸에도 힘이 들어갈 만큼 강력했다. 이기고자 하는, 살고자 하는 강한 생명력이 내 안에서도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변화 2. 처음 한 두 경기는 누가 세게 맞기라도 하면 고개를 돌려버렸는데, 자꾸 보다 보니 너무 조심스러운 경기는 지루하게 느껴지고 상대방한테 무섭게 달려들면서 몸을 던져 공격하는 걸 보면 속이 다 시원했다. 와아아! 구경하던 사람들도 한 목소리로 감탄하면서 응원했다. 이기고 나서 당연하다는 듯 사람들에게 웃어 보이며 기세등등한 모습은 그것 또한 보기 좋았다.


변화 3. 겁 많고 아픈 거 싫어하는 우리 부부가 시합에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체육관의 선수부 수업이나 주짓수 수업은 언젠가 배워보고 싶어졌다.


변화 4. 겉멋이 늘었다. 슈퍼맨처럼 날아 공중에서 주먹을 쏘는 거랑, 한 바퀴 휘리릭 도는 힘으로 잽 날리는 걸 보고 "오, 저건 뭐지?!" 기억해 뒀다가 바로 다음 수업 때 코치님 앞에서 선보였다(?)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요?!" 아직 기본도 잘 못하면서 그만 까불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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