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블로 빅뱅 E 프리미어 리그 '440.NX.1100.NR.PLW21'
세계적인 경매사 소더비(Sotheby`s)에 시계 '빅뱅'으로 유명한 위블로(Hublot)의 커넥티드 워치가 올라왔습니다. 쉽게 말해 스마트워치인 셈인데요, 사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 시계 자체보다는 2020년쯤 만들어진 이 시계가 경매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론 2021년에 공개된 200개 한정 모델이지만, 이 시계는 202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위블로가 프리미어 리그의 타임키퍼가 된 해죠.
스마트워치가 경매에 올라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여기저기 검색을 해봐도 대형 경매사에서 스마트워치를 다룬 기록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아주 흔한 경우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다보니 아직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기계식 시계처럼 스마트워치의 헤리티지를 논할 날도 그리 많이 남진 않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뮤지션들이 일부러 단종된 신디사이저를 구매하듯 10대 친구들이 옛날 느낌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구식 스마트폰 공기계를 사는 시대니까요.
신문물같던 궐련형 전자담배 아이코스도 초창기 스틱인 히츠(HEETS)를 단종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스마트워치가 경매에 오르고 그에 대한 헤리티지를 논하는 게 별로 어색하지 않은 날이 곧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IT '덕후'들이 시계 경매에 등장하는 모습도 조만간 볼 수 있겠군요. 실제로 바로 1년 전인 2023년엔 스티브잡스가 손으로 쓴 애플 광고 초안 메모는 RR옥션에서 한화로 2억원을 훨씬 웃도는 약 17만6000달러에 낙찰됐습니다.
그가 1970년대 만든 첫 PC인 '애플-1'은 22만3000달러에 낙찰됐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3억원에 가까운 액수입니다. 잡스가 서명한 수표, 신었던 샌들 등도 경매에 오른 바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스타가 탄생하고 팬덤이 만들어지면, 그들의 모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헤리티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계식 시계는 기계식 시계대로 두고, 시계 경매의 영역이 조금 더 넓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리미어 리그의 공식 타임키퍼인 위블로의 이 '프리미어 리그 한정판' 커넥티드 워치처럼요.
경매에 오른 위블로 시계의 모델은 '빅뱅 E 프리미어 리그'입니다. 레퍼런스 넘버는 440.NX.1100.NR.PLW21.
앞서 말했듯 이 시계는 위블로가 프리미어 리그의 공식 타임키퍼가 된 약 2020년쯤 만들어졌습니다(모델 공개일 2021년). 2023년 공개한 100개 한정판 기계식 시계 '클래식 퓨전 크로노그래프 프리미어 리그'와 디자인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티타늄으로 만든 케이스와 세라믹으로 만든 베젤·버클, 사파이어 크리스탈 글라스, 퍼플 패브릭 스트랩 등 아주 전통적인 위블로 시계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위블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샌드위치 구조 케이스도 적용했습니다. 배젤 - 미들 케이스 - 케이스 백을 쌓아올린 뒤 작은 스크루로 고정하는 것이죠. 위블로 빅뱅 특유의 입체적인 디자인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다만 이제부터 조금 이질적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무브먼트는 '퀄컴'의 스냅드래곤 웨어(SDW) 3100입니다. 2018년 공개한 퀄컴의 스마트워치 플랫폼으로, 저전력 구조로 배터리 수명을 늘린 것이 특징입니다.
스마트워치를 사용하지 않는 '앰비언트 모드(↔인터랙티브 모드)'에서도 아날로그 다이얼로 시간을 표시해 시계 특유의 감성을 살리기엔 제격이죠. 파워리저브는 약 1일입니다.
다이얼은 'Digital Hublot Watchfaces' 즉 위블로만의 디지털 다이얼 디자인을 적용했습니다.
다이얼 크기는 42㎜로, 새틴처리와 폴리싱 마감을 적용해 빛을 받았을 때 입체감이 더해집니다. 다만 방수는 3atm. 즉 30m 수준입니다. 정말 간단한 생활방수만 되는 정도죠.
대신 재밌는 기능도 있습니다. 이 시계는 위블로의 전용 앱 'Hublot Loves Football Premier League'와 연동된다는 것입니다. 사용자들은 이를 통해 경기 시작 시간을 15분 전에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득점, 페널티, 교체, 옐로·레드카드, 추가 시간 등을 애니메이션 알림으로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경기가 시작되면 '경기모드'로 자동 전환되고, 경기가 종료된 후엔 다음 경기를 카운트다운 해주는 기능도 더해졌습니다. 팀 라인업과 비디오 판독(VAR) 결정도 앱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두 경기가 동시에 열릴 땐 두 경기를 상호 전환하면서 진행 상황을 알 수도 있습니다.
위블로의 대표인 리카르도 과달루페(Ricardo Guadalupe) CEO는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1년 이 시계를 공개할 때 "이 어려운 시기에 축구는 전 세계 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쁨의 원천'"이라며 "위블로는 축구를 사랑하고 가장 위대한 리그들과 협력해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열정적인 팬들과 세계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리그가 더 가까워지도록 고안한 커넥티드 워치인 위블로 빅뱅 프리미어 리그를 소개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라며 "위블로는 프리미어 리그와 협력해 시계와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을 줄 수 있어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새삼스럽지만 기계식 시계를 넘어 스마트 워치로도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시계를 찬 것만으로도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한편으론 아타리나 닌텐도의 옛 게임기기를 보는 느낌도 듭니다. 슈퍼마리오 게임처럼 온갖 상상력을 기능으로 구현한 옛 카시오 전자시계를 보는 감성도 있고요.
사실 저는 기계식 시계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 시절 카시오 시계도 상당히 좋아합니다. 조금 촌스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당당해보이고, 재밌고 귀엽고 활기차니까요. 어쩌면 4년 전 고이즈미 신지로가 했던 '펀하고 쿨하고 섹시한'은 카시오를 두고 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LVMH그룹의 위블로와 태그호이어를 필두로 이처럼 '새로운 시계의 장'이 다시 열린 것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물론 시계 마니아들과 이들을 넘어선 일반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떨지 모르겠고, 이번 프로젝트의 성패 역시 쉽사리 점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시계는 언제나 이런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저는, 무브먼트의 생동감 못지않게 시계 애호가들을 자극하는 것은 시계의 역사 속에 묻어나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생명력, 그리고 이들이 성공했을 때 붙는 또 다른 이름인 헤리티지라고 믿습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