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화 Aug 10. 2018

선택의 문제

20180810


내 삶을 어렵게 만드는 건 누구도 아닌 나다.

누구도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것도, 공부를 지속하는 것도...

모두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암말 않고, 글만 쓴다면 문제가 없고,

암말 않고, 읽고 쓰고 외우고 시험만 친다면 상관이 없다.

그런데 모든 것이 대화로 이루어진다.


북카페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토론이나 발표에서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다.

목소리가 좋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냐, 좋다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떨림없이, 목조임없이 소리가 나왔음 좋겠다.


목소리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더이상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힘겹게 시작한 모든 일들은 '목소리'를 요구한다.

그런데 최근엔 성대시술을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죽을 지경이다.


안해도 되는 선택. 16년 반 만에 다시 시작한 공부는 후회할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걸 몸이 거부한다.


그냥 찌그러져서 밥만 축내며, 이름없이 무명작가로 살아도 되는데

나는 왜 발악하는가? 나의 선택이 혐오스럽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욕망들을 가시밭에 던지고 지근지근 밟고 싶다.

내장이 터지고 피멍이 든다 해도.


굳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왜 증명하려 하는가?

밥벌레처럼 살아도 되는데....

나이가 들어가고, 뭐든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시작한 일들

그건 내게 고통이고 수모이고, 시험이다.

예상은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남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왜 내게는 시험이 되어야 하는가?

공부처럼 즐거운 게 없는데, 글쓰는 것도 즐거운 일인데

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든다. 내장은 고장이 나고, 목소리는 안 나오고....


좀 더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면 그 방법을 선택하고 싶다.

어제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쪽'을 팔았다.

그나마 학생들은 괜찮지만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집단에서 나는 늘 열등한다.


내 곁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

날 너무 사랑해서 뼛속까지 나를 이해하는 사람,

혹은 루저의 욕망, 나로 인해 열등감을 회복하려는 사람.

극단적인 유형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청각장애인들은 아예 말을 못하면서도 산다고...

차라리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병이라면 오히려 마음은 편하겠다.

요즘은 장애인들을 향해 비장애인들이 함부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졌으니까.


다만,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극히 비장애적인(정상적인) 집단에서 경쟁하는 일.

'연축성발성장애'란 이 희귀한 병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내 삶에서 이 병은 가장 큰 고통이다.


모든 이해 관계없이 살아간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을 안다.

그래서 난 내가 빨리 노인이 되어 버렸음 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차라리 무기력해질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좋겠다.

빨리 죽는다면 더 좋겠지....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게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나의 꿈은 하루 빨리 노인이 되는 것이다.

욕망마저 무기력한......늙어서 쓸모없는 노인!

아마 내가 자살을 한다면 그건 신부전 때문이 아니라 내 떨리는 더러운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난 투석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다. 그것이 의료과실에서 비롯된 일일지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소나기의 애증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