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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Jul 27. 2021

여자에게 좋은 직업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직업을 말하는 상황이 생기면 부럽다는 을 많이 듣는다, 주로 여자들에게서.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여자에게 최고의 직업이잖아요. 아이 키우고 살림하기에도 좋고 아이 방학 때 같이 있을 수도 있고요. 육아휴직도 3년이나 쓸 수 있다면서요? 너무 부러워요."


그럴 때 "맞아요, 좋아요." 하고 말지만, 사실 하고싶은 말이 목구멍에 꾹꾹 눌러져 있다. 당연히 하지는 않는다. 대게 좋은 마음으로 하는 말인데 그 상황을 무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여기다가 한 번 풀어놔볼까 한다.


아니 대체,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라는 게 왜 따로 있는 것인가. 나는 살면서 '남자에게 좋은 직업'이라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어봤다. "와, 그거 남자에게 진짜 좋은 직업이잖아요!" 이런 말을 하면 그 자리의 모두가 일시 정지되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렇다면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 정확히는 여자에게 주어졌다고 여겨져 온 '고유의' 일. 그러니까 가사노동, 육아, 돌봄(남편 내조, 부모봉양 등) 등을 무리 없이 해내면서 직장에 나가서 돈도 벌어올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그 일의 성격이 성취나 성공, 혹은 승진을 지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즉,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여성 고유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자녀 양육을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적당한' 전문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일단 다 수긍한다고 치더라도 이게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 되는 이유라면,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 여자만 빼고 나머지 가족에게 좋은 직업 아닌가?


또한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고 말할 때, 그 이유는 보통 그 직업인이 하는 일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거나, 혹은 즐거워 보이는 일. 돈을 많이 벌거나 인정을 많이 받는 일. 보통 그런 직업을 보고 좋아 보인다고들 한다.


좋은 직업을 가졌다는 칭찬을 듣고도 떨떠름한 건 그런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이 의미 있어 보인다거나, 재미있을 것 같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거나 그런 말이 아니니까. 하지만 떨떠름함을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그런 부러움을 표현하는 여자들의 사정은 훨씬 더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아이 낳고 등 떠밀리듯 회사에서 밀려 나온 여자일 수도 있는데, 이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고백하자면, 나는 교사가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말이다.


첫째, 남들이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자신의 영역이 있다. 자기 교과와 수업에 대해서는 고유한 영역을 인정받고 분명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신규교사라도 그 사람이 하는 수업방식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물론 그러려는 사람은 있지만 무시 가능) 때로는 그게 막막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회사에서 여성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면, 교직은 이미 자신의 영역이 디폴트로 존재하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가 적다.


둘째, 조직문화가 비교적 평등하다. 직급이 있기는 있다. 평교사, 교감, 교장, 이렇게 3단계. (평교사와 교감 사이에 부장교사가 있기는 한데 이것은 보직이지 직급은 아니다.) 또한 이 직급은 행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교사의 본질인 교육에서의 레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직장 내 성폭력 문제는 대부분 직급에 차이에서 일어나고, 고과에 따라 승진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참아버리고 마는 불편한 일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도 성폭력은 발생하지만 피해자가 될 확률이 다른 직종에 비해 낮다고 해야 할까? 참 나, 내가 써 놓고도 헛웃음이 난다


이 외에도 내가 나의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는 많다. 학생들의 성장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점, 늘 배우고 갱신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점, 승진 말고도 다양한 자아실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 학교라는 뭔가 아련하고 다정한 공간... 방학이 있다는 점(암요 암요), 퇴근하고 회식 2차까지 하고 9시에 귀가 가능하다는 점(지금은 물론 못합니다) 등등... 그리고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고, 저녁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있다는 점도 물론 너무 좋다.


그러나 이 많은 장점은 내가 여자라서 좋은 것이 아니다.


아마 대부분의 (여)교사는 과거에 학생들과 함께 수업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었지, 퇴근과 동시에 전업주부로 변신하여 완벽한 밥상을 차려내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 1등 신붓감이라는 타이틀을 원했을 수도 있으나, 그게 실은 2교대의 삶을 의미한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시절이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종종 여자에게 좋은 직업을 가졌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 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직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에게는 정말 좋은 직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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