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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Aug 06. 2021

루피는 글러먹은 앤가?

뽀로로의 모든 에피소드에 나오는 대사를 외우던 때가 있었다. 한 1년인가 주구장창 봤다. 뭔 마력인지 애가 뽀로로만 보면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서 그 덕에 좀 누워서 쉬고 그랬다.


그거 보다보면 한숨 나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남자, 여자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뽀로로, 에디, 포비는 남자고 루피, 패티는 여자 캐릭터인데 남자애들의 소지품이나 인테리어에는 특별한 색을 지정하지 않지만 루피는 분홍, 패티는 보라로 딱 정해져 있는 것부터가 거슬리는데 그 정도는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얘네 노는 꼴이 아주 가관이다.


일단 도전, 모험, 경쟁, 역경과 극복, 깨달음, 심지어 실수 이런 건 다 남자애들이 한다. 여자애들은 뒤에서 따라가거나, 남자애들이 모험을 끝내고 오면 맛있는 밥을 차려주거나, 싸울 때 중간에서 중재하거나, 괜찮다고 위로하거나, 뭔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하거나, 질투를 유발하거나 그런다. 둘 중에 루피가 말하자면 어른들이 며느리감으로 좋아할 법한 캐릭터에 가깝고 패티는 좀 더 진보적인 애로 나오는데 그래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패티는 운동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에이스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얘가 주구장창 하는 고민은 '나는 왜 요리를 못 할까' 이거다. 뽀로로랑 에디는 운동이든 뭐든 서로 이기지 못해 안달이지만 루피는 그냥 타고나서 다 잘할 뿐, 죽어라 잘하고자 하는 모습은 없는데 유독 못하는 요리만큼은 끊임없이 도전한다. 남자애들 집에는 주방 자체가 없다. 놀다가 배고프면 루피 집에 간다....


그런데 뽀로로만 이 지경이냐 하면, 다른 유아 콘텐츠들도 도긴개긴이다. 더 심한 것들도 많다. 그런데 갑자기 뽀로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루피에 대한 내 마음 때문이다.


나는 루피가 너무 싫었다. 티비로 빨려 들어갈 듯한 아이 뒤 소파에 드러누워서 '아이고, 루피 이것아....' 하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애들 다 나가서 놀 때 혼자서 진수성찬을 차려내고, 눈치 없이 애들이 루피 먹을 거 안 남기고 다 먹어치워도 암 말도 못 하고, 뭐 조그만 일만 생기면 남자애들한테 달려가서 해달라고 하고, 예쁜지 안 예쁜지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하고, 맨날 울고 삐지고... 다른 무엇보다 루피가 저러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다. (그러면서도 매일 봤네. 아이가 다른 곳을 본다는 건 너무 달콤해...)


그런데 최근에 페미니즘에 관심이 커지면서 여러 갈래의 페미니즘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올바른(?) 페미니스트가 덜 올바른 페미니스트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것? 만약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나를 가장 비웃을 것 같은 사람은 안티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일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루피가 떠올랐다.


일단 뽀로로라는 콘텐츠와 루피라는 캐릭터는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루피를 현실 속의 한 인물, 그러니까 내 친구나 가족 중 한 명이라고 생각 보자.


'싹싹하고 헌신적이고 늘 예쁨 받고 싶어 한다. 핑크색을 엄청나게 좋아하고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주변에 퍼주는 게 취미다. 의존적인 성향이 있어서 혼자 있는걸 잘 못 견딘다.'


대충 이런 애. 얘가 글러먹은 앤가? 얘를 미워해도 되나?


'여자는 무조건 예뻐야 된다, 어디 가서나 눈치 빠르고 싹싹해야 사랑받는다, 여자 팔자 어차피 뒤웅박이다.' 크면서 이런 얘기 안 들어본 여자가 있을까? 또 이런 말에 세뇌당했을 수도 있지만, 그냥 타고난 성향이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루피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왜 본능적으로 루피가 미웠을까? 루피 집에 당연하다는 듯이 밥 내놓으라 들어가는 뽀로로와 에디보다 "어서 와, 오늘은 생선요리야!" 하면서 문 열어주는 루피가 미웠을까?


그 미움이 어디를 향해야 올바른 것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또 어렵다. 루피의 희생을 당연하게 누리는 다른 애들한테 분명 잘못이 있지만 또 걔네가 다 잘못했다고 하기에는 세상에 그렇게 짜여 있었고, 결국 가부장제가 잘못인 건데 갑자기 아득해진다...


하여간에 지금 중요한 건, 루피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출발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루피가 좀 한심해 보일 수는 있는데, 그래도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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