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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Oct 19. 2019

유희 일대기 (2)

한 커플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데이트만 하려 하면 자의 친구가 거머리처럼 붙어 딸려 나왔다. 돈 한 푼 안 가지고 나와서는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고. 여자는 그만 좀 따라 나오라고 남자의 친구에게 성을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반드시 단 둘이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여자는 할 수 없이 직장 동료에게 사정을 했다. 그 남자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말 한마디 안 하고 커피만 한잔 마시고 도 되니 시간만 좀 끌어달라고. 어차피 일찍 집에 가기 싫었던 유희는 순순히 그러마 다.


유희는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애쓰지 않아도 깔깔 웃었다. 가난하지만 유머가 있던 대학생은 티 없는 그 웃음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하면 유희를 더 웃게 할 수 있을지 매일 궁리했, 매일 은행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하도 티가나서 유희의 연애는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났다. 인기투표를 하면 무조건 1등이었던 유희를 넘보던 은행의 남직원들은 기웃대는 촌스런 대학생을 흘겨보며 마음을 접었다.


유희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가난하지 않았고 서울에 있는 언니, 오빠들이 사랑스런 동생에게 가져다준 옷과 학용품이 너무 많았다. 유행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명동에서 스무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꽤 많은 은행원 월급으로 동생을 거두어 먹이거나 고향에 부쳐야 할 의무도 없었다. 그런 유희는 당연히 세련된 여자였다.


반면 는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가난하지 않았던 시절이 없었고 어린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자랐다. 그렇게 는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를 쓰고 얼마 없는 여유돈을 모아 남대문시장에서 싸구려 핸드백을 사는 남자였다. 유희는 그 핸드백은 차마 들고 다니지 못했지만 그에게 확신을 느꼈다.


유희는 매일 만나자고 조르는 이 한가한 대학생이 훗날 사법고시에 합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다. 자신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던 유희 앞에서 천진한 소년이기만 했으니까. 혼을 약속했지만 그세상 물정도 모르는 것 같아 유희는 회사들을 돌아다니며 입사지원서를 얻어 대신 써서 냈다. 어느 날 어떤 회사의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중에 가 시험에 붙었다며 은행으로 전화를 했다. 유희는 당연히 회사에 합격한 줄 알고 뛸 듯이 기뻐했지, 그게 사법고시인 줄 몰랐다.


"너는 매일 남편 발 닦아주며 살아야겠다."

결혼 후 시댁 모임에서 어떤 분이 그러셨다. 유희는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그런 모욕을 들어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하자 조르던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유희가 스무 살부터 일하며 모아둔 돈으로 겨우 신혼집을 구하고 세간을 차렸는데 사람들은 마치 가 봉 잡은 것처럼 얘기했다. 시동생의 대학 등록금까지 댔는데 고맙단 말 한마디 못 들었다. 때로 남편의 직장에서 부부동반 모임을 하면 유희는 작아졌다. 사짜 부인들은 죄다 이대 출신이었다. 유희는 남편이 평범한 회사원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괴감에 빠져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남편은 바빴고, 2년에 한 번 새로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낯선 곳을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뭐든지 열심히 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유희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2년짜리 전세를 몇 번이나 옮겨 다녔지만 집안은 여느 가정집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 안에서 쑥쑥 자랐다. 사람들은 유희가 만든 잔잔한 꽃무늬의 커튼이나 앞치마 같은 것을 좋아했고 훌륭한 음식 솜씨를 칭찬했다. 시댁 식구들도 언젠가부터 유희를 신뢰했다. 하지만 유희는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둘째가 학교에 들어가고 조금 여유가 생긴 어느 날, 동네의 화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유희의 꿈은 화가였다. 당연히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갈거라 믿었던 어린 유희는 미대에 가고 싶었다. 그날 미술학원에서 붓을 잡기 시작한 후, 유희의 인생에 드디어 자그마한 방이 생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방. 유희는 그곳에서 잊고 있던 자신을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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