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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Oct 17. 2019

유희 일대기 (1)

문경 산골짜기 어느 마을. 시내가 흐르는 어귀를 따라 들어가면 고불고불한 흙길을 사이에 두고 대문 열린 집들이 오래된 터를 지키고 있는. 집들 사이사이엔 크고 작은 논, 그 안에 숨어있던 고쟁이 차림의 할매들이 무릎을 잡고 일어나 "왔는가!" 외치던. 내가 '시골'이라는 단어를 보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엄마는 그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자랐다. 외갓집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이었고 엄마는 마을의 다른 친구들과 좀 달랐다고 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여자라고 해서 집안일을 시키거나 살림을 가르치지 않았다. 집 명자와 산에서 열매를 따거나 대학생 오빠의 책을 뒤적이며 놀 때, 명자 엄마가 밥때가 되어 무서운 소리로 명자를 호출하면 그게 그렇게 아쉬웠단다.


엄마는 유희라는 이름이 부끄러웠다고 다. 시골에서 흔치 않은 느낌의 이름이라 동네 남자애들이 '유리알 유리알'하고 그렇게 놀려댔다고. 엄마 이름의 희는 계집 희가 아니고 빛날 희다. 그것도 자기만 다른 것이 이상했다고. 엄마는 그렇게 수줍고 부끄럼이 많았다.


유희는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가는 여자아이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대구에 다녀오셨고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라는 낯선 이름의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유희는 학교 이름에 '상업'이 들어가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가면 당연히 대학에 갈 수 있는 줄 알았지, 취업하는 공부를 하는 학교가 있는 줄도 몰랐.


집을 떠나 도시에서 낯선 친구와 함께 살게 되고,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알았단다. 자신의 목표가 은행원이라는 걸. 수줍고 착한 유희는 아버지가 내심  원망스러웠지만, 그즈음 양계장에 큰 불이 나 집안이 어려워졌던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유희는 전교 1,2등을 다투었고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은행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아, 유희는 여상 시절 고향을 오가는 기차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한 남자를 만났다. 두 사람의 고향은 가까웠고 학생들의 일정이 거의 비슷하니 기차에서 자주 마주쳤다. 그 남자는 유희가 살았던 도시의 작은 집 앞으로 자주 찾아왔고, 유희는 그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유희가 서울의 직장인이 되고 남자는 서울대학교 학생이 된 후에도 그 사람은 유희가 일하는 은행 앞으로 불쑥불쑥 찾아왔다.


내성적이지만 밝은 희와 달리 그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고, 그게 이상하게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하지만 분명 서로 좋아하고 있었음에도 왠지 닿을 수 없는 느낌이 있었다고. 그는 한 번도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거나 함께할 어떤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희는 속상한 마음을 내비치면 다시는 그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애타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생글생글 웃었다.


결국 유희는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 그 사실을 안 그는 유희의 집 앞에 몇 날 며칠을 살며 울었다. 그에게 유희는 언제나 그곳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집 같은 존재였다. 구태여 확신을 주지 않아도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유희는 현명하게도 그의 이기적인 눈물에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은행 앞 다방에 죽치고 앉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을 기다리는 한 대학생에게 마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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