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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Nov 05. 2019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막을 수 있었다.


그리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꺼내지 못하는 이유, 살면서 내가 엄마에게 주었던 상처를 차마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무수한 물음표를 품고 다니는 이유....


들추고 들추면 거기에 있는 문장, 내가 막을 수 있었다.


엄마는 스스로 떠났다. 온 가족이 모여 엄마의 생일을 축하한 다음 날 아침, 작은 방에서 홀로. 그날 아침 아빠의 전화, 그 이후의 시간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그 날 알았다.


엄마의 사인은 우리 가족과 외가 식구들 외에는 모른다. 당시 엄마는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이 되었다. 그렇게 많이 아픈 것이었냐고, 왜 티를 안 냈냐고 사람들은 미안하게, 혹은 원망하며 울었다. 엄마의 사인을 숨긴 건 어른들의 결정이었지만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는 모질다 할 테고 우리더러 불쌍하다 하겠지. 기억으로만 남을 엄마에게 그런 흠집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살았다. 관성이 사람을 일으키기도 하더라. 온통 엄마로 가득 찬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와 엄마가 원래 없던 집에서 엄마와 무관한 직장을 다녔다. 난 전처럼 잘 웃고 밝았지만 내 안엔 무수한 가정과 물음표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이랬다면... 달랐을까?'


엄마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무조건 나였으니까. 몇 해 전에도 엄마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때 엄마가 지옥 같은 심연 속에서 붙잡은 것은 나였다. 그 긴 터널을 벗어난 후 엄마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곤 했다. 약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렸다고. 네가 내 엄마라고. 그럼 이번에도 살렸어야지. 내가 지켰어야지. 엄마의 깊은 우울을 알았던 건 나잖아.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니, 그때까진 그게 죄책감인 줄 만 알았다.


어느 날 저녁 퇴근길, 나는 내부순환로 위에 있었다. 시속 120km의 핸들이 흔들렸다. 나는 괴물처럼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내 몸에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줄 몰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무너지기 직전까지 악을 썼다. 릿한 시야로 위태롭게 돌진하는 나를 보고 알았다. 내 속에 가득 찬 것이 분노라는 걸. 나를 향한, 세상을 향한, 그리고 엄마를 향한.


어찌할 수 없는 그 마음을 그대로 안고 살았다. 그 사이 나는 엄마가 되었고, 때론 울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찬 내 몫의 행복이 있었다. 매일 꿈에 찾아오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뜸해졌다. 시간이 그렇게 야속하면서도 고마운 것이었다.


살아있었다면 환갑이었을 작년 엄마의 생일, 그러니까 두 번째 기일을 앞둔 날. 어린아이를 데리고 납골당에 다녀올까 하다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엄마는 거기에 없는 것 같다. 대신 아이를 재우고 책상에 앉아 파란 하늘이 그려진 편지지를 꺼냈다. 무슨 이야기를 쓸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손이 앞서서 엄마에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나는 이렇게 썼다.




.....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엄마가 일찍 가서 안타깝다고만 생각했는데, 엄마는 어쩌면 살아남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끝까지, 조금 더 조금 더, 버텼을지도.

엄마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보려고 해. 우리가 엄마를 지키지 못한 게 아니라, 거기까지 살게 했다고. 그리고 거기까지 버텨줘서, 고마워. 많이 힘들었을 텐데. 밝은 모습으로 기억되게 살아줘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남아줘서 정말 고마워. .....



그 편지를 쓰고 나서 눈물을 닦자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함께 닦여나갔다.


1년을 더 살았고, 또 10월이 왔다. 나는 지금 대체 왜 말하고 싶은 걸까. 엄마의 마지막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 그간의 나에 대해서.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짐작하기에 더 꺼내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는 엄마와의 추억에 대해선 이야기하지만 마지막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건 오로지 각자의 몫이 되었다. 이젠 내 몫의 슬픔을 좀 나눠보고 싶은 걸까. 쓰고 싶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이 슬픔의 다음 페이지를 넘볼 수 있을 것 같다.


읽힐 이 글을 쓴 건, 내가 올해 가을을 보내며 함께 보내야 할 어떤 마음 때문이다. 그 마음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보낸다.


당신 덕분에 이 가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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