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충돌
영화가 개봉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봤다. 2004년 개봉작으로, 제 78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검색 사이트에 범죄영화라고 되어있었다. 범죄영화라. 얼마나 각본이 탄탄하고 촘촘하길래, 범죄영화가 작품상을 받았을까.
줄거리는 읽지 않고, 기대에 차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인물들이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누가 범인인지가 궁금했고, 유추해보려 했지만 중반까지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건 해결보다 영화가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뒤에 얼마나 큰 반전이 있길래 저런 걸까 생각했는데, 영화는 반전의 놀라움을 선사하기 보다 익숙한 감정을 살짝 두드리곤 사라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익숙하고 당연한 관계. 뻔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자면 어느 하나 같지 않은 관계. 그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그중 누군가와는 친분이 있고, 누군가와는 불편하다. 누군가에겐 아랫사람이며, 누군가에겐 윗사람이다.
여성을 성희롱했던 경찰관은 다음날 화재현장에서 그 여성을 구해야 했다. 사실 그 경찰관은 흑인을 비하하는 백인 남성이었다. (성희롱을 했던 여성도 흑인이었다.) 아버지의 진료를 위해 병원에 전화했을 때 흑인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했지만, 다음날 가서는 부탁을 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관계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어제는 내가 널 고소할 수도 있는 위치, 오늘은 내가 고소당할 수도 있는 위치. 오늘은 내가 네게 막말을 하지만, 내일은 내가 네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인생이 그렇다.
그의 후배 경찰은 자신은 공정하다고 생각하며, 흑인에 대한 편견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그도 주머니에 손을 넣는 흑인 청년을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리고 그를 향해 총을 겨눈다. 사실 청년의 주머니엔 총 대신 인형이 들어있었는데 말이다.
한 사람의 마음 자체도 이리 불안한데,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은 불협화음이 되기 더 쉽다.
크래쉬. 충돌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영화가 말하고자 인간관계에 대해 어떤 단어보다 깔끔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관계가 부딪힐 때 그 사이에서 생기는 것은 행복, 분노, 우울, 상처 그 어떤 것이든 감정을 드러낸다. 아무 감정도 안 생기는 관계란 없는 것이다. 상하관계에서 생기는 감정이든 높낮이가 같은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이든. 너와 나 사이의 부딪힘이 만들어내는 각종 소음들이 관계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사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고 나서 논란이 됐었다. 흑인 여성을 성희롱해놓고, 목숨을 구해주는 것으로 보상하는 것인가. 인종차별의 해묵은 갈등을 드러냈지만 해결방법은 현실적이지 못하고 그저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것인가 등.
영화를 그냥 영화 자체로만 보자라는 건, 어쩌면 순진하고 좁은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가진 사회적인 면을 배제하고,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사회적인 면을 고려한 사람들의 평도 워낙 많으니, 누군가는 영화 속 한 명의 캐릭터에 집중해서 혹은 영화 속 음악에만 집중해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난 이 영화를 그저 영화로, 흑인과 백인보다는 그저 인간관계의 충돌로 봤을 때,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 툭 건드려주는 느낌이 있어서 괜찮았다. 맞아, 그래. 관계란 저렇게 복잡하지, 하고 말이다.
그러고 나면, 그 어떤 관계도 함부로 쉽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도움을 주면, 다음에 내가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긴다. 그 사람에게 평생 도움받을 일은 없다,라고 자신해선 안 된다. (물론 언젠가 생길 수도 있고, 정말 평생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살아보니 그렇다. 저 사람 진짜 이상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랑 만나 또 다른 사람의 뒷담화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땐 아주 쿵짝이 잘 맞아서.
나이가 들어도 쉬워지지 않은 것이 인간관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겪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했는데도 말이다. 사람 자체를 알아가는 것도 어려우니,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생기는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