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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일상을 궁금하게 만드는 감독의 힘.

by 허니모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건 <바닷마을 다이어리>였다. 전에도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각각 영화의 제목만 알 뿐, 하나의 감독으로 묶어서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감독의 이름이 강하게 각인되어, 다른 영화들까지 찾아서 보게 됐다. 영화를 보면서 ‘큰 사건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재밌지?’ 의아해하면서 본 기억이 난다.

네 자매의 소소한 일상인데, 잔잔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했다.


물론 주어진 상황은 일상적이지 않고 다소 파격적이지만, 풀어가는 과정이 격하지 않고 평화롭다. 저들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받아들이지 싶을 만큼.


처음부터 왜 다른 영화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도 그런 점은 마찬가지다. 가혹한 상황 속에 인물들을 던져놓고는 절대 비논리적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감정 폭발도 없고, 잔인함도 없다. 그렇다고 슬픔이나 분노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인물들 모두가 하나같이 밝고 따뜻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안도가 되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조차도 가볍게 여겨질 만큼.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도 부모의 이혼으로 두 형제가 떨어져 산다. 어른스럽고 듬직한 형은 엄마와, 자유롭고 철이 안 든 것 같은 동생은 아빠와.


아이들에겐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형제는 그리 어둡지 않다. 게다가 부모까지도.


특히나 아이들이 새로 생긴 신칸센을 보러 어른과 상의 없이 1박 2일을 한 상황에서도 무난히 넘어간다. 실상은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눈이 충혈되도록 울거나 할 텐데, 영화에선 가볍게 넘어간다. 그런데도 그 가볍고 밝은 전혀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다.


진중한 주제를 산뜻하리만치 가볍게 다루는 분위기가
영화 전반에 흐르기 때문이다.



새로 생긴 신칸센이 양방향에서 부딪혀 지나가는 순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친구의 그 말을 듣고, 기적을 바라며 형과 동생은 기차가 교차하는 중간지점으로 간다.


형의 소원은 다시 네 가족이 같이 사는 것이고, 동생의 소원은 가면라이더가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소소한 이야기인가. 그런데 재밌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도 네 자매의 별 거 아닌 소소한 일상이 재밌었다. 대체 왜 그럴까. 왜 그들의 일상이 계속 보고 싶은 걸까.


그 해답을 감독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에서 찾았다. 묻지도 않았건만, 궁금해하는 걸 어찌 알고 친히 알려주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보았지만, 두 장면에선 하하하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형이, 또 한 번은 동생이 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신칸센이 지나가는 순간 형과 동생, 그들의 친구들은 목놓아 소리치며 각자의 소원을 빈다. 그런데 정작 한 사람, 그토록 기적을 바라던 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신칸센이 떠나고, 동생이 말한다.


"소원이 이뤄지면 좋겠다."

"난 말야.. 소원 말 안 했어."

"왜?"

"가족보다 세계를 선택했거든, 미안."

"아니 사실은 있잖아. 나도 다른 소원을 말하고 말았어. 미안해."


아... 세계라니.

이 단어는 아빠가 형에게 했던 말이다.

"니가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보다 더 큰 일에 관심을 가진 인간이 됐으면 해. 음악이라든가, 세계라든가."


무엇이 형을 하룻밤 사이에 변화시킨 것일까.

할아버지가 만든 빵의 밍밍함이 은근 중독성이 있는 단맛이 난다는 걸 느끼게 되면서?

보호자 없이 떠난 여행에서 문득 가족보다 중요한 건 다른 게 아닐까 깨달아서?


아마 이해일 것이다. 모르던 것을 확연히 알게 되거나 깨달아서가 아니라, 문득 그 말이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하고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 타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간다.



또 하나의 장면은 동생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빠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아빠 여기 앉아봐.

뭐야 심각한 표정 하고.

재밌게 지내는 척하고 있지만 엄마 아빠가 이렇게 헤어져서 많은 걸 참고 있는 거야.

그건 정말 너희 둘한테 미안하게 생각해.

그럼 아빠도 견뎌야 할 때는 견디도록 해.

응.

아빠는 내 덕에 양육수당 받고 있잖아. 그거 반만 주면 안 될까?

너, 정말...

새 기타 사는 건 다음 달로 미루고.

야, 너 정말...


아, 이 아이 어쩌란 말인가. 너무 귀엽다. 형의 진중함을 시종일관 웃음으로 날려버린다. 헤헤 웃는 표정은 정말 연기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연기보다는 약간 인터뷰에 가까운 표정들이 보여서 더 좋았다.


두 형제의 일상이 궁금해진다. 오늘은 어떨지, 내일은 뭘 할지, 무슨 생각을 할지.




사소하든 거대하든 우리가 바라는 기적은

누군가의 바람으로, 나의 노력으로, 너의 배려로, 온 우주의 도움으로.

언젠가는 진짜 일어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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