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국회의원이나 구, 시의원들은 공약 달성률이 보통 50-60% 정도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 직이 되고 나서 막상 상황에 닥쳐서 자기가 무언가를 바꾸려고 할 땐 현실적인 어려움에 많이 부딪힐 것이다. 그런 것처럼 아이들의 학생회장 공약도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아이들은 특별히 예산을 생각하거나 상황을 생각해서 공약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런 게 있으면 재미있겠다!'인 경우가 많아서 무턱대고 공약을 받으면 달성이 어려운 경우가 무척 많았다. 2019년엔 그냥 공약을 받다 보니 공약 숫자도 어마어마했고 대부분 달성하기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 수준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도 분명 있었다.
우리 회장님의 공대여 사업
우리 회장님 (당시 아이의 별명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 아이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은 정말 나중에 큰 사람이 되겠구나 라는 아이였다. 당시 회장이 되기 위해 낸 공약이 체육대회 실시, 공 대여사업, 칫솔소독기의 반마다 설치였다. 이 것을 위해서 그 아이는 아이들에게 자체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실제로 이게 수행이 가능한지 선거 전에 자치 담당자인 나에게 와서
"제가 이런 공약을 낼 건데, 이 정도 예산이 학생회에 있나요?"라는 걸 문의하기도 했다. 또한 자기가 생각하는 교실에 비치할 칫솔소독기의 모델들도 가져와서 올해 예산에서 안된다면, 내년 예산에서 수행하면 될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해서 이것이 공약을 실천하는 자세구나! 라며 나를 깨닫게 만든 아이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내가 학생회를 막 맡았던 당시 학교 선거공약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선거 이후에 유권자였던 아이들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당선된 아이들도 잊어버리곤 했다.
"부회장아, 너 선거공약 뭐였지?"
"어... 모르겠는데요? 선생님, 제가 낸 종이에 있지 않아요?"
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우리 회장님은 회의 때 자신의 공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걸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지 대의원회의 안건으로 가져왔다. 사실 체육대회는 1회성적인 행사였고 칫솔소독기는 당장의 예산으로 불가능한 터라 지속 가능하게 해야 하는 공약 중 하나는 바로 공 대여사업이었다. 많은 학교들이 그러겠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보통 축구공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공이 없어서 공놀이를 포기하곤 했다. 회장님은 그런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축구공, 피구공 등을 빌려줄 수 있는 공 대여사업을 해야 한다고 하셨고, 나는 그것을 위해서 아이들이 움직이기 가볍고 보관이 쉬운 공 보관함과 공을 구입했다. 대의원회의에서 아이들은 그냥 두었다가는 공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므로, 공 대여자는 장부를 작성하게 했고, 대의원들이 순번을 정해서 중간놀이시간마다 운동장으로 나가기로 했으며 공대여함에 비밀번호를 설정할 수 있는 자물쇠를 걸었다.
공대여함은 이동이 간단했지만, 4층의 학생회 실에서 매번 내리기는 어려워서, 교무실에 비치했다. 덕분에 아이들이 매일 와서 공 대여사업을 잘 진행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기롭게, 매일 공을 내놓겠다며, 점심시간에도 내놓겠다던 아이들은 점점 지쳐갔다.
선거공약 지키기 너무 어려워!
공대여장부를 쓰지 않고 가져가서 공 하나 때문에 친구랑 싸웠다는 아이도 등장했고, 공을 빌려가 놓고 뻥 차 버리고 나서 반납을 안 하는 친구들 때문에 공 찾아다니느라 수업에 늦은 아이들도 나왔다. 또한 대의원 중에서는 의욕 및 개인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아무래도 열심히 안 하는 아이들도 나왔다.
"선생님! 공대여를 왜 안 해요?!" 하면서 씩씩거리며 교무실로 찾아온 학생도 있었다. 알고 보니 공대여 사업의 단골고객이었는데, 그 주 담당이었던 아이가 자기도 놀고 싶어서 중간놀이시간에 공대여를 며칠간 안 해서 참다 참다 화가 나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대의원을 불러다가 하기로 한 일은 하자.라고 설득했고 대의원 아이는 입이 댓 발 나와서 자신의 소중한 중간놀이시간을 할애해서 공 대여함을 드르륵드르륵 끌고 나갔다.
많은 아이들이 회장님을 뽑아주었고, 회장의 공약을 학생회에서 실천을 하는데, 아무래도 잡음이 계속 들리니 이게 공약 실천의 어려움인가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학생회 아이들에게 고생한다며 회의 때 간식도 사줘보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지속 가능한 사업을 한다는 건 좀 힘들었다. 회장도 학생회 친구들과 일반 친구들 사이에서 종종 갈등이 있는 듯했다.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힘들다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회장도 공 대여 사업으로 지쳐가는 듯했다.
그러던 중, 출장으로 인해 내가 학생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 회의를 할 때도 나는 사실 거의 뒤에 서있고, 아이들이 회의를 진행했었다. 그래서 나는 큰 고민 없이 회장과 부회장에게 회의록을 넘겨주면서, 오늘 회의를 잘하고 회의록을 써오라고 이야기한 후 출장을 나갔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내 책상 위에 놓은 회의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학생회 내 자체 안건으로 "공 대여 사업을 중단하자."라는 의견이 나왔고, 이미 몇 달 동안 힘들었던 대의원들은 그것에 대해서 적극 찬성하며 모두 중단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이었다. 회장은 자기가 막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애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역부족이었다면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아이가 이렇게 결정된 것을 나름 홀가분해한다는 것도 느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새삼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의 쉬움과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의 어려움을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학생회 아이들을 불러다가 [혼]을 내고, 앞으로도 무조건 하라고 할 순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게 과연 학생회를 잘 이끌어나가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 역시 들었기 때문에 섣불리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학생회 회의 날 지난번 회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결정이 난 게 놀라웠고, 앞으로는 한번 결정한 사항은 최소 1학기 (5개월)은 지속해보고 그 이후에 평가회를 개최하여 지속 여부와 바꿔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그 이후 학교 내에선 수 없이 많은 공약이 나왔고, 그 공약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었다. 나는 3년간 학생회를 시작할 때 저 이야기를 해주면서, 공약이라는 것은 너희가 하기 힘들다고 그만하면 안 되고, 학생들과의 약속이므로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잘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었다. 일회 성적으로 해보고 사라진 공약도 있고, 한번 나온 공약을 2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는 한편, 3개월도 지속 못하고 지금도 학생회 실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 대여함을 볼 때마다 그때가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