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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Feb 09. 2020

하나. 웨하스 의자

이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춤추는 생각이라는 음표들로 만들어내는 의미 없는 상상의 연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지잉, 지잉, 지잉


직사광선이 검정 콘크리트 바닥을 환하게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 오후. 등 뒤로 수십 마리의 매미가 고막을 찌르듯이 우는 소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A가 아파트 단지 안의 놀이터 그네에 덩그러니 앉아서 발로 모래를 푹푹 휘저었다. 놀이터는 버려진 땅처럼 적막했다. 폭염 속에 타는 듯한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맞는 사람은 오직 A뿐이었다. 열에 달아올라 뜨끈한 쇠 그넷줄이 따가운 줄도 모르는지 작고 통통한 흰 손으로 그넷줄을 꼭 그러쥐고 있었다. 얼룩덜룩해져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흰 운동화는 빛에 반사되어 반질반질하게 달아오른 모래를 쉴새 없이 휘저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발로 푹푹 모래를 뭉개는 것을 수십 번쯤 했을 때 어느덧 나타난 둥그런 그림자가 웅크린 A의 몸을 에워쌌다. A가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공을 마주했다. A를 마주하는 얼굴은 뙤약볕을 온몸으로 등지고 있어 어두웠다. 어두운 정체를 알아보려 A가 눈을 흐리게 떴다. 이마에 촘촘히 맺힌 땀방울. B였다.


“뭐해?” B가 물으며 A의 옆 그네 안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실오라기가 삐져나온 낡은 그네 안장이 힘없이 처지더니 곧이어 끼익 끼익 하는 햇볕에 그을린 뜨거운 쇳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생각 중이야.” A는 숙였던 상체를 위로 쭉 빼서 흔들흔들 앞뒤로 그네를 흔들었다. 얼룩진 흰 운동화는 여전히 모래에 묻혀 있었다. 상체를 들자 A의 턱 끝에서부터 목까지 땀 두어 방울이 죽 흘렀다.


“무슨 생각?” B가 주머니 속에서 부스럭부스럭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다 멈추고 왼쪽 눈썹을 들어 물었다. 슬쩍 옆을 본 A는 검정 비닐봉지만 봐도 토할 것 같이 더운지 몸서리를 치더니 정면을 보고 계속 그네를 흔들었다. A의 시야에 쫙 펼쳐진 B의 왼손이 들어왔다. A의 손과는 정반대로 길쭉길쭉하게 나서 그을린 B의 손 위에는 작은 반투명 봉투 안에 든 동그랗고 노란 사탕이 자리하고 있었다.


“웨하스 의자.” A는 왼손으로 사탕만 쏙 빼 든 뒤 오른손으로 B의 손을 탁 쳐냈다. 손톱을 세워 사탕 포장의 가장자리를 뜯어 작은 파열음을 만들어내고 흰 가루가 잔뜩 묻은 노란 사탕을 꺼내 들어 입안에 넣었다. 침이 저절로 고이는 신맛에 A는 저도 모르게 오른쪽 눈을 찡긋 감았다. 엄지와 검지에 묻은 흰 가루를 쪽쪽 핥아낸 뒤 우물우물 사탕을 입안에서 굴렸다. 손에는 뜨거운 쇠에 그을린 빨간 자국들이 가득했다. 


A가 저를 쳐다보는 B의 시선을 읽고는 귀찮다는 듯이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에쿠니 가오리, 소설 제목.”


A가 챙긴 사탕과 똑같은 사탕을 챙기고 다시 부스럭 소리를 내며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검정 비닐봉지를 넣던 B도 A와 마찬가지로 노란 사탕을 입에 욱여넣고 두 눈썹을 구긴 채 말을 이어갔다. “난 그런 이야기 안 읽어.”


흔들흔들 엉덩이로 그네 안장을 앞뒤로 흔들던 A가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되물었다. “그런 이야기가 뭔데? 일본 소설? 흔해 빠진 사랑 이야기? 통속적인 불륜 이야기?”


온 얼굴로 들이차는 햇빛을 한 손으로 다 담아내겠다는 듯 왼손을 들어 가리는 시늉을 한 B도 앞만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가 됐든.”


“나도 안 읽어.” A가 답하자 B가 힐끗 A를 쳐다봤다.


“그냥 제목이 마음에 들어.” 그넷줄을 새로 감싸 쥐는 통통한 A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왼쪽 그넷줄에 머리를 기댄 A가 물었다.


“슬픔이란 뭘까? 허망하게 무너져버릴 예쁜 웨하스 의자가 언제 무너질지 몰라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 주위를 서성이며 마음을 졸이는 걸까. 딱 봐도 앉지도 못할 파슬파슬하고 연약한 웨하스 의자에 멍청하게 주저앉다가 엉덩이를 찧고 진짜 의자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걸까. 아니면 가루가 된 웨하스 더미를 끌어안은 채 더는 없을 예전의 예쁜 웨하스 의자를 그리워하는 걸까.”


“어느 것도 아니지 않을까.” 팔이 저려 손을 내리더니 이윽고 그네를 흔들기 시작한 B가 입을 뗐다. 

“제일 불쌍한 건 웨하스 의자 아냐? 의자도 아닌데 의자인 척하는 거. 의자이고 싶은 적도 없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의자인 줄 알고 곁으로 오는 거. 원치 않게 부서지고 망가지는 거.”


“대답이 멍청해.” 으득으득 사탕을 씹는 A가 못마땅하다는 듯 모래 속에 묻힌 발을 엉망으로 굴렸다.


“멍청한 질문에는 멍청한 대답이지.” B가 주머니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 사탕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A와 눈이 마주친 B가 사탕을 흔들자 A는 고개를 가로로 두어 번 저었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A는 기댔던 몸을 다시 꼿꼿이 펴 앉더니 입을 뗐다.


“언니가 죽었어.” 쉴 새 없이 부스럭 소리를 내던 B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B의 침묵을 반주로 삼은 A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눈물이 안 나. 한 방울도 안 나와. 참 이상하지. TV에 슬픈 이야기만 흘러나와도 눈물 콧물 다 쏟는 나인데 말이야.”


A는 그넷줄에 달라붙은 두 손을 떼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렸다. 손바닥 안에는 빨간 쇠 자국이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어. 웨하스 의자. 뭔가 눈물 나잖아. 의자 재료로 제일 부적합한 웨하스가 의자라니. 이런 신의 장난이 어디 있어. 파슬파슬하고 연약한 웨하스 의자. 가엽잖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까 싶어서.” 문장마다 A의 숨이 짧게 짧게 곁들여졌다.


“침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언니를 보면서 가슴을 졸이던 나였을까, 어쩌면 언니가 천년만년 함께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다가 세상에서 흔적없이 사라진 언니를 뒤늦게 알아차린 나였을까, 항아리 위에 쓰인 세 글자의 이름으로 둔갑한 언니를 보면서 내 등을 탁 치고 구멍가게까지 달리기 경주를 하던 건강한 언니를 상상하던 나였을까. 어느 게 웨하스 의자인 걸까.”


입안에서 자잘하게 부서져 이제는 단물로 녹아내린 사탕 물을 A가 꿀꺽 삼켰다. 이제는 B가 모래 속에 회색 운동화를 집어넣은 채 지분지분 모래를 구기기 시작했다. 10분 전 A의 기분이 B에게 그대로 전염이라도 된 양 B는 상체를 웅크리고 모래를 구겼다. A는 아무런 표정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내리쬐는 햇볕을 마주했다.


“근데 네 말대로라면 제일 불쌍한 건 언니인 거네. 죽음이 몇 발자국 앞에서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으스댔던 거, 사실 더 살고 싶지도 않았는데 우리 앞에서 살고 싶은 척했던 거, 원치도 않게 태어났는데 이제는 원치도 않은 순간에 삶을 강제로 끝내야만 했던 거.”


발장난을 하던 B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B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썹을 축 늘였다.


“결국, 웨하스 의자는, 신의 장난은 언니였어. 너처럼, 나처럼, 언니는 운명의 놀음일 뿐이었어.”


말간 눈을 치켜뜨고 타오르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노려보던 A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밀려오는 어지러움과 떨어지는 뙤약볕의 성난 기운에 한 번 휘청이던 A는 그대로 모래 사이에 더러운 운동화를 푹푹 빠트리며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그런 A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B가 한숨을 푹 쉬며 A에게 들릴 듯 말 듯하게 목이 쉰 소리를 냈다. “같이 가.”


지잉, 지잉, 지잉


매미의 시끄러운 울음이 난잡하게 펼쳐지는 잔인하게도 뜨거운 여름날, A의 검은 머리통 뒤로 B의 머리통이 종종걸음으로 뒤따라붙었다. 바람 한 점 안 부는 놀이터에 A와 B의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다, 짧게 줄어들었다 장난을 쳤다. 앞서 막 장난을 끝냈다는 신은 이제 누구에게 장난을 걸까. 성큼성큼 성난 걸음을 재촉하는 저기 저 A에게? 그런 A를 따라 영문모를 걸음을 이어가는 B에게? 이번에는 어떤 웨하스 의자가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질까.


지잉, 지잉, 지잉


매미의 울음이 더 거세지고 해가 더 높이, 더 기세등등하게 하늘 위로 솟구쳤다. A와 B의 검은 머리통이 점점 작아지고 흐려진다. 드리우는 운명의 그림자를 알 길이 없는 가엾은 아이들이 흐릿하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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