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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n 04. 2021

최후의 휴일

[179일차]


바람이 부는 날, 휴일을 받았다.


이제 이 말을 쓰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제 계약이 종료되는 날까지 예보를 보면 바람이나 비가 오는 날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이 내 마지막 휴일이 될 것이다.


그동안 휴일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모험'을 찾아다녔다. 낯선 길, 낯선 건물. 더 큰 도시를 보기 위해 기회가 있으면 버스를 타고 차나칼레를 향했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가 킬리트바히르 성에도 찾아가고, 겔리볼루가 끝나고 벌판이 시작되는 곳을 찾기 위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무작정 걷기만 한 적도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


몸이 녹초가 되고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힌 채로 숙소로 돌아오면, 비록 이 피로를 안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더라도, 무척이나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반복적인 일과 정신없이 자느라 지나가는 휴일. 그런 일상에 파묻힐 순 없었다. 기왕에 외국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일부러 터키까지 왔는데, 조금이라도 터키의 길을 밟고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나는 지금 외국에서 일하고 있다, 라는 감각. 한국의 도시락을 먹고 한국인들과 이야기하다가 곱게 퇴근해서 숙소로 들어가 잔다면 여기가 터키인지 한국인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출근하면 피곤하기는 똑같을 터, 나는 마음이 피곤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많이 걸었고, 짧게 잤다.


그런 모험도 이젠 끝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하게 될 모험은 무엇이 될까. 더 멀리 있는 마을? 큰 지진이 났던 이즈미르, 혹은 무리해서 이스탄불(왕복 8시간이 걸리는 이스탄불 당일치기에 성공한 O에게 경의를 표한다)?


문득 처음 랍세키의 이 낡은 일디즈 호텔의 좁은 방에 들어와 창문을 열자 보이던 뒷동산이 떠올랐다. 마치 잔디가 예쁘게 자란 골프장 같이 보이던 랍세키의 뒷동산. 말이 '산'이지 너무 낮고 완만해 구릉 같아 보이던 곳. 그걸 보며 언젠가 일에 좀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저길 한번 올라가 봐야지, 하고 혼자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이제 막 낯선 업무가 시작되어 환경과 사람에 적응하기 바빴던 초반에, 마치 닿을 수 없는 꿈동산처럼 느껴지던, 그러나 공사현장보다도 가깝게 있었던 바로 그 뒷동산. 결국 끝날 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 했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자 내 목표는 정해졌다. 정들었던 랍세키. 이제 마지막을 장식할 때다.


알바생 U와 메흐멧 식당에서 술탄 같은 식사를 하고, 나는 홀로 떠날 준비를 한다. 뒷동산에 걸어서 올라갈거라니까 알라알라(터키어로 맙소사)..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숙소로 들어가는 U. 30분이면 가고도 남는다고 거짓말로 유혹해봤지만 통하지 않는다.


준비물은 간단하다. 슬슬 더워지는 날씨를 대비한 얇은 양말과, 철저한 빈손. 물이 든 패트병 하나조차도 들어선 안 된다. 아무것도 들지도 메지도 않은 빈손과 빈어깨로 공기를 허우적 허우적 가르며 걸을 때의 자유로움이 오늘의 준비물이다. 땀도 좀 나고 목도 마르겠지만 까짓 거 대충 참고 내려와서 벌컥벌컥 마시면 그만이지. 산에 올라 목이 마른 그 순간 준비해온 물을 기다렸다는 듯 마시고 아 상쾌하다, 라고 느낄 그 몇 초의 시간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뭔가를 들고 다녀야하는 나머지의 긴 시간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이 다리를 건너면 모험이 시작된다.


그동안 내 심리적 국경이 되어 왔던 이 다리.


졸업한 후 모교를 찾은 어떤이의 심정이 된 것처럼 조금 따뜻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다리를 훌쩍 건넌 나는 문득 뒤를 돌아서 숙소 건물을 본다.


저 작은 창문을 열고 언제나 이 순간을 동경해왔었지. 랍세키 동네의 꼬마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자전거를 타며 지나다니던 이 다리. 그런 풍경들을 보면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언젠가 저 다리를 훌쩍 건너서 저 너머로 가 볼거야, 라고 혼자 다짐하곤 했다.


오늘은 그동안 충실했던 욕망보다는, 소망이란 것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날이다. 욕망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나지만, 그래도 가끔은 양심껏 먹는 야채처럼 이런 걸 챙겨 먹어야할 때도 있지.


하늘은 맑고 구름은 깨끗하다. 소망을 이루기에 좋은, 꿈 같은 날이다.


경제가 망해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나라. 식량 자급률이 100%를 넘어간다는 나라. 아무데나 뭘 심어도 쑥쑥 자란다는 곳. 멀리서 보이던 골프장 같던 풀밭의 정체는 밭과 과수원이었다. 완만한 구릉을 타고 어디까지나 뻗어 있는 밭과 과수원들. 덕분에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야채와 과일의 가격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합리적'이다.


어쩌면 이런 과수원 중 한 곳이 랍세키 지주 집안인 사멧의 땅일지도?


벚꽃과 너무 흡사해 깜짝 놀랐던 이 나무들의 정체는 아마 체리나무인 것 같다.


한적한 랍세키 시골길의 풍경.


이런 길을 걷고 있으면 도대체 현수교니 시끄러운 기계소리니, 그런 것들을 모두 잊게 된다. 그렇다고 터키로 여행을 온 느낌도 아니다. 누가 이런 곳으로 여행을 오나.


굳이 말하자면, 죽어서 천국을 온 느낌? 아무도 없고, 맥락도 없다.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와 내가 흙을 밟으며 걷는 소리 뿐. 이상한 길을 걸으면서, '여긴 어디지? 나는 왜 여기 있지?' 이런 생각이 드는 그런 길.


여기서도 보이는 현수교 공사장의 모습.


아, 이곳은 이승이었군.


잠깐 몰입했던 감성이 날아갈까봐, 살짝 못본 척 고개를 돌린다.


누군가의 집. 뭔가 당장이라도 똥고발랄한 진돗개 한마리가 냅다 튀어나올 것 같은 비쥬얼이다. 그 옆에 나뒹구는 은색 스테인레스 냉면 밥그릇이 절로 상상되고.


터키의 시골집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을지 찬찬히 둘러보고 싶긴 하지만 그러다가 있는지도 몰랐던 집주인과 덜컥 눈이 마주칠까봐 그러지는 못 했다.


할머니집 냄새가 날 것 같은 정겹고 익숙한 풍경.


바탕화면 같은 감성으로 한번 사진도 찍어보고.


이런 사진은 보통 사진 찍는 사람의 자세를 상상해본다면 더욱 재밌게 즐길 수 있다.


이런 길을 오래 걷다보니 봄기운이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 붙는다. 꽃가루, 흙먼지, 땀, 풀냄새 그런 것들. 그리스를 방금 막 칠하고 돌아가는 기계처럼 몸에 서서히 시동이 걸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요즘 땀 흘릴 일이 별로 없었지. Y와 땀흘리며 볼트를 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비바람과 더위와 추위를 피해 컨트롤 룸에서 아늑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어느덧 기후는 이렇게 바뀌어 있다. 내가 집으로 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참을 걸어 바람이 무척 부는 언덕에 도착한다.


떠가는 구름 밑으로 멀리 보이는 바닥 없는 현수교가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야, 저기 다리 만들고 있네. 고생 좀 해라. 다 만들어지면 볼 만 하겠구만.


물론 내일 내가 출근해야하는 곳이다.


볕 좋은 언덕에서 결코 시원하지는 않은 강풍(이래 봬도 공사를 멈추게 했을 정도의 강풍이다)을 맞으며 땀을 식히고 있으려니 무척이나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느긋한 마음으로 현수교를 보며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도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치렁치렁 달린 기다란 선이 그냥 조금 더 진해진 정도겠지만.


동시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지난 일들. 까마득하게 높아보이던 주탑 아래서 막막하게 올려다보던 하늘. 라이트가 내리쬐는 비내리는 밤에 크레인을 기다리며 추위를 피하려 일렬로 손잡고 춤을 추던 터키인 인부들과 반장님. 하염없이 퇴근배를 기다리던 도크. 거기서 맞이했던 새해. 용접 매연이 섞인 밥과 식어 비린내가 진동하는 고등어 반찬. 퇴근 후 G와 먹던 뵈렉. 리코더를 불던 동굴.


엔딩 크레딧이라도 올라갈 것 같은 그런 풍경을 보며 나는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그래, 아무렴 어때. 집에 가서 떠올려보면 다 추억이 되고 말 것을.


이것들은 과연 추억이 될 만큼 강렬하고 진한 경험들이었을까?


언젠가는 추억이 되고 말 현재의 시간 한가운데서, 사람은 항상 그걸 실감하지 못 한다. 먼 미래에 아련하게 떠오를, 어쩌면 사무치게 그리워할 그 순간을, 지금의 나는 이렇게 의식하며 보내고 있다. 추억의 앨범 속에 풀쩍 뛰어든 것처럼, 지금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의 현재. 나는 마음 속으로 먼 미래의 나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은 네 기억처럼 정말 푸르고 너그럽고 포근하구나.


아.. 근데 출근하긴 싫다..


최종 목적지로 삼았던 곳은 바로 터키 국기가 펄럭이는, 구릉의 정상. 숙소에서 본 근방의 풍경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멀리 보이는 깃발을 보고, 걸어서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긴 시간을 보내고 나는 이곳에 도착하였구나..


라고 하기엔 뭔가 길이 얼른 나오지 않는다. 좀 더 돌아가야겠군.


돌아가다 마주친 양떼.


식사가 한창인 녀석들(과연 식사 시간이란 게 따로 존재하긴 할까)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한국에서는 특별한 동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길가에서 노는 모습을 볼 때, 아 여기는 외국이지, 라는 실감이 난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먹으면 죽을 것 같은 색깔의 약수.


슬슬 목이 마르긴 한데 이런 걸 보니 갈증이 바로 사라진다.


불현듯 떠오르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 자취방으로 배달 오던 녹즙.


아침에 일어나서 한모금 마시면 그날의 상쾌한 기분을 아침부터 싹 날려버리는 지독한 맛에 하루 이틀 미뤄뒀더니 점점 빵빵해지던 비닐 파우치의 기억. 결국 쌓이고 쌓여서 버려야할 날이 다가왔을 때 큰맘먹고 잘라낸 파우치에 들어 있던 녹즙의 상태가 딱 저랬다. '싫어하는 것'이 썩었을 때는 정말 '악몽 같은' 냄새가 난다. 어떻게 알았냐구요? 저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정상(?)에는 이미 누군가 와 있는지 파란색 오토바이가 한 대 서있다. 자세히 보니 그늘 아래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떤 아저씨. 좋아, 혼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군. 나는 어딘지 작은 무덤처럼 보이는 공원(?) 안으로 혼자 슬쩍 들어간다.


마침내 도착한 목표점.


인터넷으로 대충 보니 뭔가 전쟁, 전사자와 관련된 곳이다. 뭐 그렇긴 하지만 내게는 역시 그저 '깃발이 있는 높은 곳'일 뿐이다. 풍경의 먼 곳에 나부끼던 깃발. 나는 걸었고 그곳에 닿았다. 마침내 소망은 현실이 되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랍세키의 풍경.


'내려다'보인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좀 비스듬할 뿐 높지 않다는 느낌이 있기는 한데..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랍세키를 본 한국인은 아마 세상에 나 혼자이지 않을까. 뭐 세상 사람들은 랍세키가 뭔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트로이'에 가까운 곳, 정도로 말하면 알까.


아까 바람이 불던 언덕에서 온갖 감성 가득한 생각을 모두 소진해버려서, 정작 여기선 별 느낌이 들지 않는다. 기대하지 못했던 걸 기대하는 발걸음. 기대대로군.


슬슬 내려가볼까.


바탕화면 2.


윈도우 XP의 그 유명한 바탕화면이,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사진이란 걸 알았을 때 받았던 충격이 기억난다. 가짠 줄 알았는데 진짜라고? 그건 또 뭔가 묘한 감정.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어 저 언덕만 넘어가보자, 라고 생각하곤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의 풍경. 그 언덕을 넘었을 때 보았던 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될 것만 같은 밭과 과수원 뿐이었다.


정말 완만하고 기름진 축복받은 땅이다.


내려오는 길에도 보이는 현수교.


'널 지켜보고 있다'라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만들어지기만 하면 정말 이동네 명물이 될 것은 틀림 없다.


세계 어딜 가도 똑같을 하트 낙서.


뭔가 누구랑 누구는 얼레리 꼴레리, 같은 내용일 것 같지만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여정의 끝. 랍세키의 시작.


즐거웠던 모험이 끝나고 마을의 어귀에 도착한다.


나름 랍세키에 오래(?) 살아서 랍세키는 다 정복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보았던 것은 랍세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터키의 전혀 다른 마을에 온 것 같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 정말 내가 알던 랍세키일까. 나는 먼 산을 돌아서 다른 시간, 다른 곳으로 온 것이 아닐까.


라고, 낭만적인 생각을 하기엔 구글 지도는 너무나 정확하고 가차없다. 여긴 랍세키다. 현대 여행자의 친구, 구글.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말도 다 통한다.


오오.. 낯선 시골길의 풍경. 랍세키의 이면.


완전히 다른 지역의 항구도시 같은 감성이 느껴지는 집을 발견해 한참 사진을 찍고 모퉁이를 돌았더니, 숙소 바로 옆의 건물이었다. 음.. 좀 빨리 도착했구나.


숙소에 들어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씻고 누웠더니 여전히 나른한 휴일 오후다. 몸이 개운한 게 뭔가 즐거운 일을 제대로 한 것 같아 간만에 마음이 즐겁고 훈훈하다. 마지막 휴일에 알맞은 모험이었다, 라는 생각.



그래, 어쩌면 마지막이 아니라, 진정한 휴일의 시작일지도 모르지.


모든 것이 끝나는 날, 나는 웃으며 여행을 떠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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