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178일차]
아침에 출근을 했더니 주간조 알바생 중 한 명인 H가 보이지 않는다. 몸이 아픈걸까. 출근 차를 놓친 걸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여러가지 가벼운 가설들이 하나씩 삭제된다.
문득 기억나는 건 어제 H가 했던 말.
'휴일을 안 주면 휴일을 가지면 되죠'
H는 정말로 자체(?) 휴일을 스스로 가져버린 걸까. 멈추지 않는 공사 일정과, 휴일근무수당을 받는 것보다 그냥 하루 쉬는 게 좋다던 H(나도 초반에는 그랬지..). 그의 마이페이스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점심시간이 될 때 쯤 팀장님이 불쑥 말한다.
"잉? H? 그만둔다고 오늘 연락 왔었는데, 니들 알고 있었던 것 아니었냐?"
그만 둔다고? 이제 일주일 뒤면 계약 만룐데? 그 소식을 듣고 나와 G는 얼떨떨해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언제나처럼 컨트롤룸에서 함께 근무하던 H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단 H의 사정은 둘째치고, 당장 닥쳐온 것은 남은 두 사람이 감당해야할 일이다. 앞서 말한대로 계약 만료까지는 일주일. 이 기간을 주간 팀은 두 명의 알바생으로 어떻게든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윈치 알바생들은 각각 북쪽과 남쪽의 드라이브 윈치라는 기계를 구동한다. 간단히 말하면 현수교의 메인 케이블을 만들기 위해 줄을 한쪽 뭍에서 반대쪽 뭍으로 운반을 해야 하는데, 그 운반해야하는 줄을 매달고 움직이는 줄(미리 설치되어 있어서 왔다갔다 할 수 있다)을 기계로 구동한다고 보면 된다.
그 기계는 앵커리지의 남쪽과 북쪽, 총 두 대가 있다. 두 대의 기계를 알바생 두 명이 각각 하나씩 두 명이서 구동하면 될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2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것이 목표인) 공사장의 업무를 기준으로 생각해본다면, 화장실도 식당도 가지 못하고 오로지 조종석에 앉아서 그 시간들을 다 보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실제로는 중간중간 쉴 틈이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니다. 뭔가 설치를 하느라 1~2분 잠깐 멈춘 사이 전력질주로 화장실까지 달려가서 볼일을 봐도 되고, 줄 하나가 다 운반이 되면 잠깐 비는 시간에 쉴 수도 있다(그 때는 반장님들이 바쁘게 일할 시간이다).
하지만 추가로 또 다뤄야하는 10톤 윈치라는 작은 기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 메인 작업을 하는 드라이브 윈치라는 기계에 비해 간헐적으로 틈틈이 구동되는 10톤 윈치 작업은 언제 호출되어 시작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무전을 듣고 튀어나가 구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작업을 하기 위해 세 번째 알바생이 있었던 건데, 이제 일손 자체가 모자라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10톤 윈치는 비교적 어렵지 않은 기계라 조금만 알면 누구나(?) 다룰 수 있다는 것. 결국 반장님들이 10톤 윈치를 맡아주기로 하셨다. 물론 드라이브 윈치 작업이 끝나면 10톤 윈치로 후다닥 달려가야하는 우선순위는 여전히 알바생이지만.
장황하게 적긴 했지만 어쨌든 간단히 말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는 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작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건지 최근에 작업량도 늘었다. 이제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퇴근하는 그 순간까지 정말 숨 쉴 틈도 없이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 일주일만 버티면 된다. 오래달리기를 할 때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아껴뒀던 모든 체력을 쏟아부어 힘껏 달리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하얗게 불태워버리고, 나는 훌훌 터키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실은 최근 가장 큰 불안감이 있다. 바로 터키에서 금식 기간인 라마단 명절이 이제 시작된다는 것. 소식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나는 라마단에 대한 정보를 접할수록 사태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뭐?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를 안 한다고? 식당을 모조리 닫는다고? 그래서 얼마나 그걸.. 뭐? 한 달 간 한다고? 뭐? 모든 도시가 다 할거라고? 뭐? 거기다 코로나 대비 전체 외출 금지도 다시 시작될 거라고?
...끔찍한 소릴. 지난 6개월간 버텨온 것은 오로지 일주일 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하늘하늘 떠나게 될 터키 여행 하나만을 보고 한 것이었는데. 이제 지겨운 도시락에서 벗어나서 드디어 터키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될 것이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에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터키 현지인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애매하게 부정적인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 그래도 문 여는 식당이 있지 않을까? 없을 걸. 그래도 이스탄불 정도의 관광도시라면 어떻게 상점들이 열지 않을까. 글쎄 모르겠는데.
여차하면 마트에서 스파게티 면이랑 마늘을 사서 알리오 올리오나 숙소에서 해먹으며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봉쇄를 한다면 바깥을 돌아다닐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무럭무럭 생겨난다. 하필이면 계약이 끝날 때 맞춰 시작되는 라마단과 굳이 이 순간에 또 다시 봉쇄를 하려는 터키 정부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과연 내가 이 일을 모두 끝마치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머물렀던 숙소를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내가 그 자유를 정말로 실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여행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던 터키, 그러나 6개월 간의 반복된 업무는 내게 어떤 관성을 생기게 했다. 하루하루 같은 길을 걸어 출근해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퇴근해서, 같은 숙소의 침대로 가 잠든다. 내 몸은 어느샌가 이 일정에 깊이 익숙해져 버렸다. 성큼 다가온 마지막날, 다시 여행자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공사용 형광색 잠바를 입고 지저분한 작업화를 신은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 것만 같다. 그 모습으로 어떻게 이스탄불을 돌아다닐 수 있을까.
정말로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