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74일차]
(Afiyet olsun = 맛있게 드세요)
가끔은 반장님들과 밥을 먹는 날도 있다.
바람 때문에 일찍 마친 날. 이럴 때면 반장님들은 술 먹을 시간이 비었구나, 환호하며 얼른 반장님들끼리 모여 술을 걸치러 간다. G반장님이 Z반장님과 술을 먹으러 가려다 문득 나를 부른다. 윈치수도 같이 고등어 먹으러 갈래? 예의상 한 말인지, 정말로 같이 가려고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건 또 넙죽넙죽 잘 따라간다.
반장님들의 음식점 초이스의 기준은 명료하다. 술을 마실 수 있는 곳. 세속국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이슬람 국가인 터키라, 술은 특별히 그걸 파는 곳을 찾아가서 마셔야 한다. 술을 파는 가게를 이미 파악해 둔 반장님들은 택시를 타고 랍세키 항구 근처에서 내린다.
그리하여 들어간 곳은 제법 분위기가 있어보이는 가게. 항구 근처에 생선을 파는 집이 있다는 건 얼핏 알고 있었는데, 반장님들은 그 가게가 아니라 다른 옆가게로 들어가신다. 여기도 생선이 나오는 건가. 단골처럼 익숙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던 반장님의 한 마디. 으잉? 고등어가 없네?
어쨌든 반장님들의 목적은 술이다. 술만 나오면 돼. 물론 내 목적은 잘 먹지도 못하는 술보다는 음식이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정에 없었던 술자리였기에, 나는 간만에 괜찮게 나왔던 도시락을 몹시 포식한 상태였다. 그래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피자를 시켰지만 역시나, 배가 부른 상태인데다가, 터키의 피자는 이런 그럴싸한 가게에 와서도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 정말 피자를 잘 못 만드는 동네.
비프 스테이크를 시킨 Z 반장님과 치킨 스테이크를 시킨 G 반장님. 그런데 어째서인지 웨이터는 메뉴를 엇갈려서 반장님 앞에 놓는다. 반반 확률인데. 또 어째서인지 그걸 그냥 드시는 반장님들. 뒤바뀐 메뉴. 태연하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반장님들. 불편하고 초조한 나. 뭔가 Z반장님은 비프를 드시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대자연의 균형이 무너진 것처럼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건 왤까.
뭐 어쨌거나 술이 중요한 거니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메뉴가 바뀐 건 아무렇지도 않게 드시던 반장님들이 술 한병한병은 깐깐하게 따져가며 드신다. 야, 니가 한병 더 먹었잖아. 아니여~ 나는 방금 하나 시켜 먹은 게 다여~ . 집에 들고 가려고 숨겨놓은 거 아녀? 딱 한 병만 더 먹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저 별 것 아닌 맥주 한 병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먹음직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진다. 술 맛이 오른다고나 할까. 그래서 군침이 돌아 한모금 삼키면, 쓴 맛에 다시 후퇴. 역시 술은 안 맞아. 터키 에페스 맥주가 이렇게 썼었나.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공사 이야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도 하고, 나로서는 평생 들어볼 일 없는 이야기들이라 얻어 먹는 음식보다 더 귀한 경험들이다. 리얼리즘 소설을 지향했다면 이 경험을 그냥 그대로 살려서 글을 쓰면 되었겠지만, 글쎄 나는 이런 경험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그런 개인적인 고민도 좀 해보고.
반장님들과의 회식만 있을쏘냐. 우리 윈치수 알바생들끼리도 회식을 한다.
처음 얼굴도 모르던 사이에 격리호텔에서 각자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가 문득 기억난다. 밥을 다 먹고 도시락을 버리러 가다가 음식물을 흘려서 창틀에 낀 내용물들을 도구도 없이 빼느라 쭈그려앉아 낑낑대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일 이야기를 하면서 낄낄거리며 같이 식사를 하는 친구(거의 동생들이지만)들은 그때 그 사람이 나였다는 걸, 아니 그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얼굴을 모르던 시절의 기억에는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친구들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실루엣을 가진 그림자들만 휙휙 지나간다. 공항에서도, 호텔에서도, 코로나 검사를 처음 받으러 이동하는 버스에서도.
..뭐 그냥 내가 사람들 얼굴을 잘 기억 못하고 다녔던 것일 수도 있고.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유난히 걸린다.
어쨌든 최근에 새로운 랍세키 맛집을 발견했다. 사실 가끔 터키 수프인 초르바를 살 때만 들르던 곳인데, 초르바만 전문인줄 알았던 이 집에서 케밥도 판다는 걸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집의 케밥이 랍세키에서 거의 탑클래스로 맛있었을 줄이야.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나 퍽퍽한 닭가슴살 꼬치인 타욱 쉬쉬 케밥만 팔던 다른곳에 비해, 이곳은 기름진 갈빗살을 구워서 판다는 것. 터키에서 닭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던 이유는 소스를 잘 쓰지 않는데다 퍽퍽한 살이라 도저히 먹을 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내가 선호하는 부위를 파는 가게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여기로 왔을 걸.
거기다가 이곳의 라흐마준은 바삭바삭하고 쫄깃한 맛이 살아있어서 야채를 싸서 먹기 무척 좋다. 갓 구워 나온 라흐마준은 투명한 느낌의 붉은색 기운이 도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다는 느낌을 준다. 차나칼레에 있는 귤렌 피데의 스페셜 라흐마준 다음가는 순위를 매길 정도.
그리고 이곳의 원래 이름은 메멧 쾨프테지인데, 이름 답게 이곳의 메인 메뉴인 쾨프테 역시 상당히 맛있다. 담배 모양의 쾨프테는 떡갈비 모양의 다른 곳과는 차별화된 모양인데 별다른 잡내 없이 맛있는 고기맛이 느껴져 먹어본 쾨프테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장점은 바로 2층에서 식사를 하고 갈 수 있다는 것. 현재 코로나 예방 정책으로 인해 터키에서는 공식적으로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고 방문포장만 가능하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식당의 구석진 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집이 있기는 한데,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데 음식도 맛있고, 2층에서 맘 편이 식사를 할 수도 있고. 이만한 가게가 또 있을까.
디저트로 퀴네페(쭉 늘어나는 치즈가 들어있는, 바삭하게 구워 시럽에 흠뻑 담근 파이)를 시켰더니 그 위에 서비스(인가?)로 카이막까지 올려준다. 세상에. 원래도 혈관이 터질 것 같은 디저트였는데. 이런 배덕감이 느껴지는 조합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는 이야기(아다나 케밥만은 별로였지만).
진작에 알았으면 더 자주 왔을걸. 쓸만한 단골집을 계약 만료 일주일 남은 지금에야 발견한 것이 한일 뿐이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노동을 많이 했으니, 이제는 케밥을 많이 먹어서 진정한 '케밥 먹는 노동자'로 무사히 일을 끝내도록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