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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19. 2021

개 VS 고양이

[167~171일차]


이제 마지막 주간조 변경이 끝났다. 나는 아마 주간조로서 이 일을 끝내게 될 것이다.


거의 한달 만에 햇빛을 보며 일하려니 빛에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눈이 부시다. 화창한 하늘도, 흰 구름도, 푸른 바다도 뭔가 낯설기만 하다.


문득 처음 이 공사장에 도착했던 날이 기억난다. 그때도 이렇게 맑았지.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저 공사장이 복잡하게만 보였다. 넓고, 높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5개월 반이 지난 지금은 정말 좁고, 높고(..낮지는 않고), 단순했다. 어디가 어딘지 다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곳곳마다 사건과 추억들이 깃들어 있다. 여기서는 바비큐 파티를 했었지. 저기서는 줄이 튀어서 큰일이 날 뻔 했어. 그리고 여기에는 눈이 오는 날 대자로 그냥 푹신하게 누워버렸고.


그리고 동물들. 그래 구역마다 그 구역을 담당하는 녀석들이 있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문득 언젠가 주탑으로 출근하던 시절 배에서 만났던 고양이가 생각난다. 터키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람을 무척 경계하는 녀석이었는데, 어쩌다가 우연히 배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놀라서 배 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숨고 난리였다. 과연 그 녀석은 무사히 배를 탈출했을까.


아침 체조시간만 되면 찾아와 사랑을 요구하는 황금색 개


요즘들어 앵커리지에는 뉴페이스의 황금색 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앵커리지를 지키던 갈색 개(이름을 그냥 앵커리지개라고 혼자서 불렀다)가 있었다. 그녀석은 어디서 학대 받다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유난히 꼬리를 말아 가랑이 사이에 넣고 다니면서 풀 죽은 안쓰러운 모습을 보이던 녀석이었다. 이리저리 작업터에서 쫓겨나면서도 사람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보면 진짜로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데 그 녀석은 유독 다른 개들한테는 체급을 불구하고 맹렬하게 짖으며 달려들어 쫓아냈다. 심지어 영역을 침범한 개들이 서너마리가 되는 집단이라도 밀리는 적이 없었다. 그래 앵커리지가 밥이 좀 많이 나오는 황금 같은 지역이기는 하지.


그런데 그런 녀석이 언젠가부터 자기보다 덩치도 큰 이 황금색 개와 찰싹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앵커리지개는 숫놈이고 이 황금색 개는 암놈인 걸 보니 아마 녀석에게도 봄이 찾아온 모양이다. 다른 개한테는 그렇게 맹렬하던 녀석이 이 황금색 개한테는 반항도 못하고 물면 무는대로 물려주며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을 보는 게 웃길 뿐.


햇빛 좋은 날 널브러져 낮잠을 자다가 걸린 앵커리지개.


이런 모습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


'개 팔자가 상팔자지~.'


솔로일 땐 그렇게 애절하게 앵겨들더니 요즘 영 무관심해졌네.


늠름한 황금색 개.


앵커리지개를 잘 부탁해.


꼬리 좀 펴고 다니라고 말해주고.


이제는 밤에 퇴근한다.


뒤집개의 강아지들은 슬슬 초반의 바들바들 떨던 떨둥이 시기를 지나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깨무는 깨물이 시기가 찾아왔다. 강아지들은 금방금방 큰다. 조금 후면 이 구석진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와 공사장을 누비며 돌아다닐 것이다.


봄이라 그런지 고양이도 새끼를 낳았다는 소문이 들린다.


공사 초기에 창고에서 새끼 두 마리를 홀로 기르던 까만 어미 창고양이가 창고를 떠나 다른 곳에서 또 새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 제보를 들은 이상 또 찾아가지 않을 수 없지. 터키인 인부들의 숙소의 신발 보관방이라던데 이틀 간의 수색 끝에 간신히 고양이들의 보금자리를 찾아낸다.


고양이 꽃다발

찾아갔더니 이러고 있다. 잠시 심장이 덜컥.


뒤집개 강아지들의 들기 좋은 뚠뚠한 엉덩이를 볼 때는 '그래도 집에서 개를 키운다고 나도 이제 강아지파로 바뀌었구나' 싶다가도, 이 모습을 보자 또 '그래 한 번 고양이파는 영원한 고양이파지' 한다. 역시 고양이는 요물이야.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귀여울까.


작고 소중해..


소중하긴 하지만 녀석들은 날 바라보고 있지 않다. 고양이란 그런 존재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


사람은 결국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사람은 케을 선택하게 된다.


오랜만에 일찍 마친 날 동네 토박이들의 맛집 케르반에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다. 슬슬 6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계약이 만료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자유의 몸이 되는 그날 며칠간 해서 터키를 좀 돌아볼 예정이다. 그동안 참고 참았다. 정기휴일도 정시퇴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삶. 머릿속에서 여가와 휴식을 싹 지워버리자 그제야 찾아온 마음의 안식(혹은 마비). 외국 생활을 경험하러 왔더니 주어진 군대 생활. 정말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이 한을 터뜨리겠다고 얼마나 다짐해왔고 또 벼르고 있는가.


서서히 머릿속에는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그날'이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한다. 디데이. 그날이 오면 아아 그날이 오면 나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터키 케밥의 정점이라는 아다나 케밥을 먹으러 아다나로 훌쩍 떠나버릴 테다.


그날을 대비해 오늘 주문한 것은 케르반의 아다나 케밥. 아다나 출신인 쥬르프는 랍세키에 아다나 케밥 맛집이 어딨냐고 물었더니 여기 아다나 케밥은 모두 쓰레기라고 했었지. 어디 한번 쓰레기로 예행 연습을 해보자.


그렇게 시킨 아다나 케밥은 웬걸, 꽤나 맛있다. 거부감이 드는 향 없이 아다나 케밥 특유의 구수한 고기 반죽의 감칠맛만 있다. 쉽게 말하면 그냥 터키식 고기 핫바지만 물어보는 터키인마다 최고의 케밥은 아다나 케밥이라고 한다. 고기 완자를 포크로 눌러 부수면 안에서 흘러나오는 매운(안 맵다) 양념이 기분좋게 섞인 기름. 고기의 정체는 종잡을 수 없지만 보통 양과 소의 혼합이라고 한다.


이 맛을 잘 기억해두자. 그리고 마침내 멀지 않은 훗날 아다나의 어느 한 음식점에서 아다나케밥을 먹으며 이 케밥의 맛을 떠올릴 것이다.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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