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아이 May 17. 2021

멀어져야 하는 것들

[165~166일차]


주야 교대의 날. 이제 나는 다시 주간조로 간다.


주간과 야간을 얼마나 교대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적응을 해서 주간으로 바뀌든 야간으로 바뀌든 시차걱정 잠걱정을 별로 하진 않는다. 몇 시간을 잤고, 또 얼마나 피곤하든지간에 하루 이틀 일을 무작정 하다보면(어쨌든 일하는 중에는 잠을 잘 수 없으므로) 알아서 퇴근 후에 뻗어서 자게 된다. 그러면 저절로 바뀌어 돌아가는 생체 시계.


그렇게 주간 야간 주간 야간 하다보니 어느새 집에 갈 날이 성큼 다가와 있다. 이제 남은 일수는 보름 정도. 보름 뒤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웹툰 세 편 정도 되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마 이것이 내 마지막 야간조로서의 퇴근일 것이다. 일지에 사인을 하고 숙소까지 가는 차를 기다린다. 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아서, 그동안 강아지들하고 놀기로 한다.


최근에 뒤집개(사람만 보면 배를 뒤집어서) 녀석이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아빠는 아마도 이 근방의 서열 1위 차우차우인 것 같다. 그래 이렇게 공사장에 개가 많은데 봄도 다가오는 것 같고 강아지가 출현할 때가 되었지. 다른 알바생 친구들은 이미 보고 귀엽다고 난리다. 나도.. 나도 볼거야!


설레는 마음으로 개집이 있다는 곳을 찾았는데 세상에나, 까맣고 하얀 점박이 꼬물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다. 다들 꼬물꼬물 거리기는 한데.. 차우차우를 닮아서 그런지 다들 새낀데도 뭔가 덩치가 있다. 요 뚱뚱한 녀석들! 푸짐한 엉덩이에 앙증맞게 달린 짧은 꼬리를 보니 심장이 몹시 아프다.


다들 까만 점박이인데, 유독 금빛 털에 하얀 녀석이 있다. 밝은 갈색 점박이 엄마인 뒤집개를 유일하게 닮은 녀석이다. 그래 강아지들을 보면 꼭 튀는 한 녀석이 있더라. 너는 사랑받겠지 아마. 먹을 걸 하나라도 더 먹을 거야. 사람들이 좀 귀찮게 굴 수도 있고. 그게 너한테 좋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차우차우도 짙은 갈색의 개다. 분명 얼굴은 차우차우를 닮은 것 같은데. 그럼 까만색은 어디서 온 거지? 뭐 개들 사정이야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분명한 건 귀엽다는 것. 요 뚱뚱한 녀석들!


아직 너무 어려서 사람들 눈치를 보며 손길을 슬금슬금 피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이 바뀔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질풍애교의 시기가 되면 저 멀리서 사람 형체만 봐도 다다다다 달려와 꼬리를 흔들고 신발끈을 물어 뜯겠지. 그럼 귀찮아하는 쪽은 사람이 될 것이다. 아니 정정. 어떻게 니들이 귀찮겠니. 귀여워 죽겠는데.


그렇게 퇴근을 하고, 교대를 위해 추가로 주어진 반나절의 시간동안 또 바깥 나들이를 하기로 한다. 퇴근 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안 되지만, 쉬지 않고 나가서 노는 것은 가능한 법. 목적지는 겔리볼루. 이번에도 나들이 멤버는 고향 친구인 JB와 알바생 동생인 O다. 그래도 바깥으로 나들이하기 좋아하는 멤버라(사실 JB는 내가 억지로 데리고 나온 측면이 있지만) 종종 이렇게 세 명이 모이게 된다. 이제는 익숙해진 구성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자마자 우리가 찾은 곳은 케밥 집인 코자 우스타. 터키에 온 것을 처음 실감나게 해줬던 내 원픽 이스켄데르 케밥을 파는 곳이다. 이 케밥은 꼭 일이 끝나기 전에 한 번은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오늘도 이곳에서는 이스켄데르 케밥을 팔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제한 정책 이후로 되네르(세로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고기덩어리, 여기서 나온 고기로 이스켄데르 케밥을 만든다)를 여간해선 불에 걸지 않는다. 이러다가 결국 못 먹고 가게 생겼다. 유일하게 꼭 두 번 먹고 싶다고 생각한 음식이었는데. 결국 마음의 한으로 남을 것 같다.


대신 선택한 곳은 피자집. 평소에 눈에 띄어서 봐두긴 했던 곳인데, 뭐 결국 5개월만에 이렇게 오게 되었다.


물가는 역시 싸다. 오뚜기피자보다도 싸다. 그런데 맛은..


솔직히 터키에 와서 '피자'가 만족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미노피자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국가라 그런지 페퍼로니가 페퍼로니가 아니다. 돼지고기를 쓰지 않은(아마도 소고기겠지) 터키 소시지 수죽이 대신 올라갔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쿰쿰한 이 냄새가 수죽을 만들 때 쓴 향신료 냄새인지 아니면 뭔가 발효가 된 터키 소고기 냄새인지 모르겠다. 따로 먹으면 그냥 먹을만 하다, 정도로 끝나겠지만 피자에 올라가는 순간 치즈고 빵이고 모든 맛을 수죽의 쿰쿰한 맛이 다 삼켜버린다. 거기다 '옥수수가 올라간 피자는 장난감 피자다', 라는 내 신조에 따라서 아무리 진지한 느낌의 가게에 가도 모두 피자가 장난감 같다. 장난감 같다는 것은 묵직한 게 아니라 길거리나 마트에서 사먹는 오뚜기 피자, 그 정도의 느낌이라는 것. 하다못해 피자스쿨 정도의 묵직함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토마토 소스가 거의 들어있지 않다시피 한 것도 이 불만족스러움을 증폭시킨다. 치즈의 고소하고 기름진 맛과 토마토소스의 시큼짭짤한 맛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맛으로 피자를 먹어야 하나. 아마도 터키에서의 생활이 끝날 때까지 만족스러운 피자는 먹지 못할 것 같다.


다만 주인 아주머니 자매(로 보이는)가 너무나 너무나 친절해서, 기분은 무척 좋았다. 두 사람의 말투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어떤 거부감이나 긴장감도 없었고, 의식적인 친절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릴렉스 된 선의. 웃음. 기분 좋은 호기심. 뭐 피자 맛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그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바람이 좀 불고 날씨가 쌀쌀하다. 나는 그래도 바다 건너 왔으니 해안 산책로를 걸으며 절벽이라도 보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별로 내켜하지 않는 JB와, 이미 절벽을 한번 본 O를 데리고, 순전히 내 욕심으로 맞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일행.


명확한 날씨 경계선. 이쪽은 흐리지만 바다 건너 저쪽은 천국이다.


바람이 제법 불어서(알다시피 우리의 휴일은 바람부는 날에만 존재할 수 있다) 절벽까지 가는 것이 꽤나 쉽지 않은 일이다.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춥다 춥다 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좀 더 상스러운 언어로. 후드를 뒤집어 쓰고 옷깃을 여미며 필사적으로 한발짝 한발짝 바람을 뚫고 발을 내딛는 그 소동이 은근히 즐겁다(나만). 어쨌든 기왕 볼만한 지형인 절벽에 왔으니 JB도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 간다.


그리고 그냥 숙소로 가기 아쉬워 돌아오는 길에 들른 겔리볼루의 카페. 코로나 정책 때문인지 우리는 불 꺼진 3층으로 안내된다. 뭔가 다락방 같은 구조의 좁고 어두운 3층에는 먼저 와 고독을 즐기고 있던 터키인 남자 한 명이 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그 고독을 좀 깨야겠습니다.


살 찌는 음료들을 시키고, 바람을 피하며 우리는 수다를 떤다. 각기 다른 일터와 시간대로 갈려서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는 우리 셋. 각자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느새 오 개월 반. 이야기할 것들이 얼마나 풍족하게 쌓였을까. 우리가 함께 공유한 사건들. 모르는 일들. 갈 때가 다가오니 벌써 다 추억이 된 것만 같다.


그렇게 겔리볼루 원정을 끝내고 이제는 각자의 자리로.


이제 서서히 모든 것들이 작별을 고해야할 것들로 보인다. 이별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사람들, 물건들, 장소들.


문득 생각이 든다.


내 고향 탑정으로 다시 한 번 올라갈 수 있을까. 집에 가기 전 그 높고 근사한 경치를 한 번이라도 볼 일이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을 주는 루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