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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12. 2021

행복을 주는 루틴

[158~164일차]


똑같은 출근길과 퇴근길, 똑같은 작업이 반복되고 있다.


야간조인 나는 저녁 일곱 시 경에 일어나 씻고, 삼십 분에 숙소 앞으로 오는 미니버스를 탄다. 버스는 십분 정도 달린다. 공사현장 입구에 도착하면 내려서 체온을 재고 카드를 찍고 게이트를 통과한다. 그러는 동안 이미 게이트를 넘어 온 미니버스는 식당으로 가는 사람들을 다시 태우기 위해 옆구리 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차에 오르지 않는다.


아침(야간조니 저녁이라 해야할지도)을 먹지 않기도 하고, 겨우 200미터 정도만 더 가면 근무처인 앵커리지인데 굳이 몇 초 차를 탔다가 나만 앵커리지에서 따로 내려달라고 터키어로 부탁하는 것이 좀 쑥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출근과 퇴근, 잠밖에 없는 일상에 잠시나마 여백을 두고 싶은 목적이 가장 크다. 6개월만 버티면 끝이라고는 하지만(이제 한 달도 안 남았네), 숨을 참고 지내는 것도 정도껏이다. 주간조와 야간조가 교대를 할때, 우리들은 서로 '수고하시고, 5분 뒤에 봅시다'라는 인사를 건네곤 한다. 정말로, 숙소로 돌아가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 어떻게 씻는 지도 모른 채 준비를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우리는 출근자와 퇴근자가 바뀌어 '방금'과 같은 인사를 하고 있다. 정말로 '5분 뒤'에 보지 않기 위해서, 나는 10분 정도 혼자 걷기로 한다.


느긋하게 걸어도 1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길. 해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버스가 사라지고 자박자박, 내 발자국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가 찾아오면 나는 마스크를 슬며시 벗는다. 공기는 상쾌하다. 일도, 사람도, 마스크도 없는 10분. 별 것 아닌 시간이다. 그냥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늘을 보며 터벅터벅 걸어갈 뿐인 시간이다. 그러나 이 짧은 틈이 없다면 깜깜한 일상에 잠겨 질식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즐기던 차에 언젠가부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다. 터키인 반장인 에르잔 역시 나처럼 입구에서 바로 앵커리지까지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또한 담배를 한 대 물고 터벅터벅 앞서 걸으며 자신만의 여백을 즐긴다. 고요한 산책길을 두고 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아니, 신경을 쓰는 건 나뿐인지도. 에르잔이 충분히 앞서가길 기다렸다가 뒤늦게 출발한다. 공기중에는 에르잔이 남긴 담배 냄새가 짚불을 태우는 냄새처럼 은은하게 섞여 있다. 그렇게 나의 산책 시간은 1분 더 길어진다.


요즘 들어 생긴 또 하나의 루틴. 바로 퇴근 후 먹는 뵈렉이다.


힘들게 일하고 퇴근 후 케밥을 하나 걸치는 삶을 머릿속에서 그리면서 왔는데, 어쩌다보니 뵈렉 먹는 노동자가 되어버린 나.


요즘은 계속 야간조 생활을 하기 때문에 퇴근이라고 하면 해가 막 뜬 아침이다. 아침의 퇴근길이란 이런 느낌이다. 이제 세상이 막 잠에서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천천히 에너지를 끌어올리기 시작할 때, 나는 충혈된 눈으로 밝은 아침이 찾아온 세상을 바라본다. 피곤한 눈에 들어오기에 너무나 눈부시고 시린 세상이다. 하지만 공기만은 상쾌해서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잠깐 정신이 맑아진다.


지친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 도착하는 곳은 숙소가 아니라 숙소 앞 빵집. 마트도, 식당도 문을 열지 않는 이곳에서 아침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은 바로 빵집이다. 이집에서 오전시간 한정으로 뵈렉이라는 메뉴를 파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뵈렉이란 만두와 파이 중간 정도 되는 느낌의 터키 간편식인데, 약간 기름지게 구운 페스트리 피에 고기, 치즈, 감자 이렇게 세 종류의 내용물 중 하나를 넣는다. 순대처럼 꼬불꼬불 길게 통째로 구워내 원하는 그램 수만큼 넓적한 칼로 툭툭 잘라서 담아 준다.


이 집 뵈렉의 특징은 얇고 쫀쫀한 밀가루 피가 크게 기름지지 않게 담백하게 구워졌다는 데 있다. 내용물은 많이 들어가있지 않지만 그 덕분에 담백하고 맛있는 밀가루 피를 충분히 즐길 수 있어서 좋고, 거기다 내용물 자체가 잡 냄새가 안 나고 신선한 편이다. 특히 두부 같이 하얀 페이니르 치즈가 퍽퍽하지 않고 고소해서(터키의 페이니르 치즈는 대부분 침이 마를 정도로 퍽퍽하다) 처음 먹었을 때 놀랐던 기억이다.


약간 약한 듯한 간과 여러 겹의 얇은 피, 담백한 정도의 기름의 양은 오히려 지친 몸을 끌고 와서 잠들기 전 부담스럽지 않게 먹기 좋다. 덕분에 퇴근후 아침식사인지 저녁식사인지 모를 식사를 거르고 나는 항상 이 빵집에 들러 뵈렉을 먹게 되었다.


신선한 햇빛이 드는 테라스에 앉아, 구운지 오래 되지 않은 담백한 뵈렉을, 터키에서만 볼 수 있는 탄산 음료 하나와 함께 먹고 있으면 오늘 하루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는 느낌이 들며 기분이 나른해진다.


비록 기대했던 맥주와 케밥은 아니지만(퇴근 시간대에 문을 여는 식당이 없네) 스스로 원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루틴이라는 사실이 나를 즐겁게 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의 루틴에 정신이 파묻혀버릴 것 같을 때, 무의식의 늪에서 나를 건져주는 의식적인 루틴. 그것 덕분에 요즘의 무료한 삶을 버텨낼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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