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84일차]
마지막 그림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회사와 유쾌하지만은 않은 주고받음이 있었다. 길게 적을 것은 아니고, 어떻게 보면 떠나는 내가 아니라 계속 남아 있을 친구들과 관련된 일이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는 삼 일 동안 계약 연장을 하게 되었다. 이미 뽑은 새로운 알바생들이 오면 인수인계를 하기 위하여. 나와 G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아마 2개월 정도, 연장을 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나름 열심히 일을 하고 도움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알바생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모여서,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주워들은 정보들을 공유해가며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머리도 굴렸고, 또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수고스러운 일들도 굳이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의 눈에는 그저 대체가능한 알바생. 그 정도일 수도 있다는 것.
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도 했고, 또 결론적으로는 잘 해결 되었다. 묘하게 찜찜한 기분만이 남을 뿐.
이전에 말했듯이 3명에서 2명이 된 주간조 알바생 인원으로 인해, 업무는 유래없이 빡세다. 숨을 쉴 틈도 없이 허겁지겁 일을 하고 코로 점심과 저녁을 먹고 무전기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하다보면 퇴근 시간이 된다. 계약 만료일만 보고 참았던 숨을, 3일 간 더 참아야 한다는 사실에 순간 체력이 빠지긴 해도, 어떻게든 또 보내고 지나가는 게 시간이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함께 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사진을 남긴다. 여섯 달 동안 만큼은 누구보다도 친해졌던 사람들과. 카톡도 있고 한국에서 만날 수도 있는 한국 동료들과는 달리, 이제는 영원히 못 만나게 될 외국인 친구들이 주 대상이다.
가기 전에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반응이 하나 같이 똑같다. 수스쿤, 아직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구, 도대체 왜? 그것이 알바의 운명. 이제 곧 PPWS 공정이 끝나고 나면 보금자리였던 컨트롤룸도 사라질 것이고, 필요한 윈치수 인원은 더 줄어든다고 하니. 거기다 돌아가서 해야할 일도 있다.
언제나 정겹게 나를 맞아준 장난기 많은 제밀 아저씨.
까불지만 영리하고 누구보다 (밥배달을 포함한)도움을 많이 준 어린 사멧.
휘파람을 불고 있던 내게 가장 먼저 말을 걸었던 터키인, 쥬루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 편해지는 미소를 씨익 웃고 마는, 몰래몰래 낮잠을 자도 일은 잘해서 미워할 수 없는 메멧.
나 못지 않게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쥬루프의 고향 동생 야신.
맛있다고 했더니 며칠이나 피스타치오를 손에 꼭 쥐여주던 메숫.
돌i 오누르.
컨트롤룸 옆방에서 간접적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베이사와 파트마.
그리고 묻는 건 뭐든 친절하게 가르쳐주며 우릴 도와주는 중국인 엔지니어 웨스트.
사진으로 찍어 멈춰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벌써부터 그립기 시작한다. 아주 오랫동안 이런 모습으로 내 앨범에 남아 있겠지.
와중에 일찍 마치는 날이 있어서, 또 메흐멧(메멧) 식당으로 G와 함께 자고 있던 Y를 깨워 식사를 하러 간다.
케밥도 케밥이지만, 이 동네에서 가장 인상 깊게 먹었던 음식을 꼽으라면, 바로 이 사소한 음식인 라흐마준이다. 어딜 가도 밀가루 반죽부터 밀기 시작해서 오븐을 거쳐 즉석에서 구워 야채와 함께 나오는 라흐마준.
갓 구워 바삭함과 따끈함을 함께 가지고 있는 라흐마준에, 물기가 묻어 있는 생생한 야채를 취향껏 올리고, 보기만 해도 침이 도는 레몬을 쭉 짜서 한 바퀴 휙 두른 다음, 김밥처럼 돌돌 말 때 들려오는 바삭바삭거리는 소리. 라흐마준의 그 '맛있는 소리'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거의 무전기로만 함께 했던 반장님들과도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한다. 알바생들이 있든 말든 무뚝뚝하게 각자 할 일 하시는 것 같은 반장님들도,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숨겨 왔던 정을 이리저리 끄집어 내신다.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는 분들도 많겠지만 뭐가 대수랴.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보면 아는 사람. 부를 때는 어이 윈치수, 어이 드라이브 윈치긴 해도, 떠나간 내가 누구였는지, 어렴풋이 다들 알긴 알 것이다. 처음 이 일에 뛰어들기 전에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들 무척이나 젠틀하시고 좋았다. 시작은 탑정의 반장님들과 함께였지만, 마지막은 남이라고 생각했던 앵커리지 반장님과 함께일 줄이야.
사실 라마단은 이미 시작이 되었다. 공사장에서는 힘겨운 공사일을 하면서도, 라마단을 지키기 위해 해가 떠 있는 동안 식사를 하지 않는 터키인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몰래몰래, 혹은 별 신경 안 쓰며 먹는 사람도 있고, 이처럼 그런 사람들을 위해 영업을 하는 식당들도 있다.
하지만 역시 주변 눈을 의식해서 대놓고 먹는 장사를 할 수가 없어서, 불 꺼진 주방 같은 곳에 숨어서 식사를 해야 한다. 반장님들과의 마지막 만찬이 이루어진 곳도 주방에 급히 마련한 테이블이다.
저번에 먹지 못했던 고등어를 먹기 위해 이번에는 잘 찾아 왔다. 반장님이 의기양양하게 고등어! 를 시켰는데, 뭔가 바둑만 잘 둘 것 같은 느낌의 식당 주인 아저씨가 자취방스러운 냉장고에서 꽁꽁 언 냉동 고등어를 꺼내 조그만 팬에 기름을 두르고 버너 위에 대충 굽는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든다.
반장님들의 병맥주 릴레이가 시작되고, 우리가 무슨 안주를 시켰는지 잊어갈 무렵, 에게 해처럼 넓은 접시에 덜렁 담겨 나온 구운 고등어 필렛 하나. 불안한 마음으로 한 포크 먹었더니, 이럴수가. 내가 방금 눈으로 보았던 그 과정들에선 나올 수 없는 깔끔한 감칠맛과 촉촉함. 고등어의 기름기도 적당해서 고소하다.
가끔은, 나올 수 없는 조건에서 나올 수 없는 결과가 나올 때도 있다. 문맥에 연연하지 말고 감각을 열어놔야 하는 이유. 힘든 경험을 할 거라 생각하고 뛰어든 공사장에서 내가 얻어낸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해외여행을 가면 외국인들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경치와 음식만 보며 다니던 내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남게 될 줄이야.
아마도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 그들과의 인사를 위해 주어진 유예기간이 아닐까 싶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 다가왔다. 이 모든 것들과 작별할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