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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Oct 03. 2021

넷째 날, 걸으면 닿는 곳

이스탄불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났다. 먹구름이 좀 있지만 환한, 그런 날이었다.


고민 끝에 정한 다음 행선지는 아마시아라는 마을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연 경관이 뛰어난 산악 도시. 나는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아마시아 사진 하나를 보자마자 인터넷을 꺼버렸다. 성이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암석산을 배경으로 마을의 시계탑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던가. 그거면 충분했다. 정보는 필요했지만 스포일러는 불필요했다. 알지도 모르지도 못한 상태. 낯은 익지만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아마시아를 만나고 싶었다. 출발은 내일. 오늘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을 여유롭게 둘러보기로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탁심 광장이었다.


여행을 다닐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최대한 걸어 다니는 습관은 대학교 1학년 때 고향 친구와 갔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생겼다. 사실 걷는 걸 좋아해서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었다. 어디서 티켓을 끊어야 할지, 노선도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걸 물어볼 사람도, 언어 실력도 없었다. 날마다 그날 가야 할 곳까지 어떻게 갈 것인지 궁리하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그저 걸어버리기'.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멋진 건물만 보고 무작정 그까지 걸어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을 걷고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걸으니까 정말 가지는구나. 너무나 당연했던 그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당시의 나는 그랬다. 어디를 간다고 하면 어느 지하철을 타고 어느 역에 내려서, 혹은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떤 정거장에 내려서, 몇 블록을 걸어 어떤 모퉁이를 돌아 도착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약속된 몇 개의 단계를 거치면, 움직이는 네모난 큐브가 나를 어디론가 옮겨서 목적지에 내려놓는다. 만약 내가 그 약속, 그러니까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느 정거장에 내려야 한다는 그 정해진 경로를 모른다면, 나는 그곳에 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이란 것은 그저 만들어낸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과 상황을 언어화한 것에 불과했다. 나는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을 직접 걸으며 언어가 축약해버렸던 세계가 실제로는 어땠는지를 알게 되었다. 너무나 예쁘지만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위치의 빈 카페, 지저분했지만 누군가의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골목 계단, 꼭 사고 싶었던 것들로 가득했지만 어느 것 하나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쌌던 기념품 가게. 그런 것들을 지나고 넘어설수록, 까마득히 멀리 보이던 그 건물(아마 로마 시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이 점점 커지면서 다가오더니 결국 웅장한 모습으로 내 앞에 정말로 나타났다. 그런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덜컹덜컹하는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고 의미 없는 광고판 안에서 활짝 웃는 사람의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우르르 몰려 내려서 별안간 목적지와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 이후로 나는 여행을 떠나면 최대한 열심히 걸어 다니곤 했다. 집에만 틀어박혀서 하루하루 쌓아왔던 몇 년 치 걸음 마일리지를 이 며칠 동안에 다 써버리겠다는 듯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은 원래 보려고 했던 문화재나 풍경이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걸어 다니면서 마주친 의외의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여행을 시작하고 삼일 동인 힘껏 걸어 다니기만 했더니, 넷째 날이 되자 슬슬 발에 무리가 왔다. 무한정 걸어 다닐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제 우여곡절 끝에 마련했던 이스탄불 교통 카드인 '카르트'를 사용해 지상철인 트램을 타기로 했다. 해시 코드를 제대로 등록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내 카드는 아니나 다를까, 출입구에서 인식이 되지 않았다. 빨간색 금지 표시가 뜨며 날카롭게 울리는 경고음에도, 나는 어제 경비에게 비밀스럽게 배웠던 것을 기억하며, 침착하게 옆의 다른 출입 기계로 옮겨 카드를 댔다. 그러자 초록불이 들어오며 열리는 문. 이것이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트램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관광객이 아니라 노곤한 하루하루를 시작하려는 터키 현주민들이었다. 길거리와는 달리 마스크를 대부분 한 상태였다. 코로나 하루 확진자 6만 명의 터키. 나는 콧잔등 위의 마스크 철심을 더욱 구부려서 피부와 밀착시켰다. 내가 불안한 것보다, 출근길에 낯선 동양인과 같은 트램을 탄 그들이 더욱 불안하겠지. 서로의 면역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덜컹덜컹. 트램은 다리를 건너 언덕길을 올랐다.

이번 여행에서의 첫 트램 탑승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환승역에서 내렸더니 갈아탈 역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뭐 어쩔 수 없나, 하면서도 마치 그러길 바랐던 사람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일이 되면 다리가 더 튼튼해져 있든가 아니면 고장 나 있든가 둘 중 하나겠지.


머리 위로는 가느다란 비가 방울방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젖어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탁심 광장으로 가는 길은 쉬웠다. 무조건 높은 곳으로. 위를 향하는 모든 길은 탁심 광장으로 통할 것이다.


이스탄불은 입체적인 여행지다. 관광을 하기 위해서는 위아래로도 많이 움직여야 한다. 탁심광장이 그렇고 갈라타 타워도 그렇다.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 위 성까지 올라갔던 나폴리도 그랬었지. 그런 여행은 몸이 좀 힘들긴 해도 볼거리가 더욱 다양한 맛이 있다. 지형이 가팔라지면서 집의 생김새도 지형에 맞춰서 독특해진다. 비탈길의 풍경은 분명 지상의 그것과는 다르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비탈길의 주민들을 상상했다. 그런 주민들 중 하나가 나라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어느 추운 겨울날 퇴근길에 간식거리로 치킨 뒤림 케밥을 사나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 손목에 걸고,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계단길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집 앞의 낯익은 가로등 밑에서 잠시 고르면서, 후끈하게 데워진 코트 안주머니에서 못생기고 정겨운 집 열쇠를 짤랑, 꺼내게 될까. 열쇠를 넣고 720도를 돌려야 하는 문을 열 때마다, 그래 이것이 터키지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 도착한 탁심 광장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7년 전에 왔을 때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길 곳곳에는 경찰차와 장갑차들이 있었다. 데모라도 있었던 것인지 어딘지 격앙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곁을 스쳐 지나갈 때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가 났었다. 내게 있어서 탁심 광장은 오래된 모스크나 향신료로 가득한 전통 시장이 아니라, 가장 '현재'적인 터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완전히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 많지 않은 사람들. 공사 중이라 문을 닫고 가림막을 친 모스크.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 그래, 어쩌면 이것도 '현재'의 터키일지도 몰랐다. 코로나 시대를 한창 지나고 있는 터키의 현재.

광장은 사람이 모여 있을 때 광장이었다. 내가 본 것은 그저 높은 곳에 있는 감흥 없고 평범한 찻길뿐. 조금 실망한 나는 근사한 점심 식사로 그것을 만회하기로 했다.


쥬베이르 오작바쉬라는 케밥집을 알려준 것은 공사장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베이사였다. 한국에서 지냈던 적이 있어서, 한식 도시락을 까면 마늘냄새에 도망가지 않던,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터키인이었다. 한국어 시험을 공부한다며 가끔 자신의 답안이 맞는지 물어볼 때가 있었는데, 이미 한국어를 잘 하는지라 내가 딱히 도울 게 있을까 싶었다. 대신 내가 터키어를 배우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별 인사를 배웠던 것도 그녀에게서였다. 켄디네 이이 박. 배웠던 인사로 작별을 하자 이제 막 친해지려고 했었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선물로 존 레논 책갈피를 선물로 줬다. 길게 머리를 기르고 둥근 안경을 쓴 존 레논의 전신 캐릭터 책갈피. 그것은 내 세계에선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물건이었다. 나는 내 세계가 아주 조금, 발가락 끝으로 걷는 걸음만큼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베이사와 언젠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터키에서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뭐냐고 하는 말에 양고기라는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훌륭한 양갈비를 먹어보고 싶다고. 그러자 베이사가 추천한 집이 이곳, 쥬베이르 오작바쉬였다. 과연 현지인 추천의 이 레스토랑은 내 탐식 세계를 확장시켜줄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더니, 고기를 굽는 메인 화로가 있는 1층은 불이 꺼진 상태였다.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문이 열려 있고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금 식사가 가능한지 물었고, 지배인처럼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1층은 안 되고 2층에서만 식사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나는 좋다고 말하고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도 불이 꺼져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내받은 자리가 너무 어두워서 다른 자리를 둘러보다가 뭔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구석진 창가 자리를 발견했다. 창문 때문에 약간 돌출한 공간에 식탁과 의자가 구겨지듯 간신히 들어간 좁은 자리였는데, 폐쇄선호증이 있는 나로서는 이 자리에 꼭 앉아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구겨지듯 들어가 식사를 하면 기분이 정말 좋을 거야.


주문을 받으러 온 남자에게 혹시 저기 창가 자리로 옮길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약간 당황한 듯이 보였다. 그러면서 곤란하다는 말을 했는데, 라마단 기간에 식사를 하는지 감시를 하러 다니는 경찰들 눈에 띌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포기하려는 찰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냥 자리를 옮겨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너무 창밖을 기웃거려서 티가 나지는 않게 해달라는 당부를 했다.


신나는 마음으로 나는 햇빛이 쏟아지는 구석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인공조명이 아니라 선명한 햇빛을 받으며 식사를 하는 것은 작지만 특별한 일이었다. 나는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에서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을 듬뿍 먹음은 피자를 야외 테라스에서 먹었던 기억을 했다. 얇은 프로슈토를 투명하게 만들며 관통하여 치즈 위에 쏟아지던 그 따사롭고 선명한 햇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햇빛을 받은 음식은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햇빛으로 하얗게 빛나는 식탁 위에 올려진 것은 부드럽게 익은 네 쪽의 양 갈비였다. 이곳의 양갈비는 물론 터키에서 여태까지 이리저리 먹었던 양갈비들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부드러웠고, 적당히 지방이 있었고, 냄새는 얌전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센 양냄새가 나는 걸 좋아하지만, 그래도 나름 붙어있는 지방을 곁들여 먹을 때 분명한 양 맛이 나서 괜찮았다. 진짜로 맛있었던 것은 밑에 깔려서 역시 양고기 기름을 듬뿍 머금은 얇은 빵이었다. 고기 기름을 머금은 빵. 그것은 김치찌개 숟가락이 지나가 빨간 자국이 남은 하얀 쌀밥과 같은 것이라 묘하게 입맛을 당기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나는 이제 양갈비는 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며 먹었던 다양한 양갈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한국인들이 거부감 없이 접하기 좋은 양고기 음식이라 반장님들이 많이 찾기도 했고, 알바생 동료들과 일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러 갈 때면 언제나 1순위로 양갈비를 찾곤 했다. 식고 말라비틀어졌던 것. 지방 없이 텁텁하기만 했던 것. 나름대로 냄새가 좋고 맛있었던 것. 그리고 그런 여행을 거쳐 이제 내 눈앞에 마지막에 어울리는 양갈비가 있었다. 그래, 양갈비 여행은 이제 여기까지.

문 앞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회색 무늬 고양이를 뒤로하고, 나는 가게를 나왔다. 별다른 소득이 없는 아침 일정이었다. 해외여행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나가기 싫은 날 억지로 몸을 일으켜 광화문 교보문고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기분이랄까. 눈에 딱히 들어오는 것도 없었고 기분도 잘 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우중충하게 흐린 날씨 탓이라는 걸 곧 깨달았다.


흐린 날을 싫어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아주 오래전 비가 내리는 어두운 낮에 창밖을 보며 '나는 이런 날씨를 좋아해'라고 생각하는 나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아마 그것은 흐린 날을 정말로 좋아했다기보다, 그런 날씨를 좋아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 흐린 날이 더 많았던 겨울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나는 맑은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맑은 날을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일지도.


탁심 광장에서 언덕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며, 이럴 땐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여행할 기분이 나지 않아도, 교통수단을 알아보지 않아도, 얼른 생각나는 다음 목적지가 없어도 이렇게 아무렇게나 걸어 어디론가 갈 수 있는 것. 혼자 하는 여행엔 그런 자유로움이 있었다. 그것엔 물론 대가가 있었다. 아직도 입에 감도는, 방금 먹은 양갈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할 어떤 사람이 없다는 것 같은.


꽤 괜찮았지 그거.


나는 나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 마을 랍세키에 있을 때에 비해 두세 배는 비싸긴 해도.


한국에선 밖에 나가서 뭘 좀 먹으면 만 원이 기본인데, 이스탄불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이 만원 초반대면 '합리적인' 가격 아닐까.


그렇지. 각오하고 먹었던 건데 이 정도면 아무리 호화롭게 다녀도 별로 가난해지지 않을 거야.


그것은 분명 혼자서 두 팔로 팔씨름을 하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표정 없이 터벅터벅 언덕길을 내려가는 동양인 남자의 머릿속에선 그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해협까지 거의 다 내려오자 배를 잔뜩 쌓아 놓은 부두를 보았다. 배를 보관하거나 수리하는 곳 같아 보였다. 이곳의 풍경은 이상하게도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다리도 쉴 겸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곳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누군가 고생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하고 지나쳤을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달랐다. 철골과 크레인, 늘어뜨린 와이어에서 낯설고 거칠고 위험한 느낌이 아니라, 뭔가 익숙하고 정겨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얼마 전까지 내가 몸담았던 공사장의 풍경. 겨우 6개월을 그곳에서 지냈을 뿐인데. 나는 곳곳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저 풍경 어딘가에서 그 위험한 틈바구니를 훌쩍 뛰어넘어 다니는, 안전모를 쓴 내 모습을 그려 넣어 보았다. 삑삑, 경보음을 내며 후진하는 지게차를 피하고, 지나가던 두 사람의 일행한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는, 구석에 있는 어느 창고 건물의 어두운 입구 안으로 쑥 사라지는. 여행 4일 차, 나는 마침내 벗어난 그곳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 다리를 건넌 후에 나는 여태껏 가본 적 없던 곳으로 방향을 정하고 걸었다. 그곳은 탑도, 광장도, 궁전도 없는, 일반적인 관광지와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관광지로 향하는 길이 있는 사거리에서 엉뚱한 골목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 나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스탄불에 도착해버렸다. 거기엔 까맣게 그은 얼굴을 한 노인들, 축구공을 가지고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엄마들이 있었다. 푸근한 냄새(아마도 동네 수선집이나 빨래방인 것 같은)가 나는 하얀 수증기가 길가로 난 굴뚝에서 올라왔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빛이 바랜 간판의 작은 음식점과 빵집들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나는 마치 관광지라는 트루먼 쇼의 무대에서 방금 막 탈출한 사람처럼 그런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관광지가 아닌 이스탄불. 당연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하게도, 그런 곳이 있었다.


문득 떠오른 것은 어릴 적 컴퓨터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언덕길을 올라오던 때의 기억이었다. 평일이고, 여전히 밝지만 어딘가 그윽한 하늘의 늦은 오후였고, 나는 아무런 일정에 속박된 것 없이 자유로웠다. 낯선 가정의 익숙한 찌개 냄새를 맡으며, 나는 혼자만의 규칙으로 보도블록을 밟는 게임을 했다. 여기서 이걸 밟으면 죽는 거야. 여기선 점프를 해야 해. 여기선 한 발로 가야 해. 발을 헛디뎌 실수를 하면 즉석에서 수정되는 관대한 규칙 때문에 보도블록을 따라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그 게임을 멈추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더라. 우연히 만났던 동네 친구였을까. 아니면 날마다 인사하던 떡볶이집 아줌마가 보였기 때문이었던가. 그때를 떠올리면 드는 그 아련한 기분이 낯선 이스탄불의 어떤 골목길에서 물씬 느껴졌던 이유는 뭘까. 나는 탁심 광장에서의 실망감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이런 곳에도 모스크는 있었다. 아야 소피아 모스크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모스크 앞 광장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이라기보단 현지인들 같아 보였다. 나는 이제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모스크 내부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모스크의 내부는 시원하고 고요했다. 모스크에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 걷느라 뜨겁게 달아오른 맨발에 닿는 돌문턱의 서늘한 느낌이 좋았다. 언제까지고 휘적휘적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던 두 다리는 푹신한 카펫이 깔린 실내에 들어서자 갑자기 후들후들 떨리며 엄살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이 지겨워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 쉬기로 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굉장히 호화로운 휴식처였다. 입장료도 없이 더운 날 쾌적하게 들어가서 마음껏 머물다 나올 수 있는 곳이라니. 거기다가 내부는 아름답고 고요해 혼자만의 생각에 골똘히 생각에 빠지기도 좋았다.


눈앞에는 남자와 시계가 있었다. 시계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갔다. 그러면 시간을 버는 것 같았다. 한때는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고 시계를 보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좋든 나쁘든 시간만큼은 천천히 흘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던 다리가 좀 회복이 된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 다니며 모스크의 내부를 구경했다. 예쁘게 생긴 기도실 같은 곳이 있어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바로 옆이 경비실이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문구를 본 적이 없었지만 뭔가 애매하게 찔리는 느낌이 혼자 들어서 고민을 하다가, 뭐 문제가 있으면 이야기를 하겠지,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랬더니 드르륵하고 열리는 경비실의 문. 이게 아니었나?


뭘 하고 있지?


금테 안경을 끼고 제복을 입은 경비 아저씨가 나오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답했다.


사진을 찍었다. 방이 무척 예쁘다.


나는 경비 아저씨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하얀 머리에 비해 젊어 보이는 얼굴인 그의 표정은 다행히도 온화해 보였다.


사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나?


내가 묻자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아니, 아니, 괜찮다. 사진을 찍어도 된다.


그의 말에 안심하면서, 이미 원하는 사진은 찍었지만 괜스레 두어 번 더 기도방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내 행동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유심히 보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터키어를 할 줄 아네. 어디서 배웠나?


차나칼라에서 다리를 만드는 일을 했다. 거기서 배웠다. 지금은 내 일을 마치고 터키를 여행 중이다.


그랬더니 그가 엄지를 세우며 감탄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나칼레 다리? 좋다. 굉장히 근사한 일이다.


감사하다.


그는 내가 터키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문장이랄 것도 없이 단어만 대충 툭툭 던지는 식이었는데, 이것도 터키어라고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공사장에서 틈틈이 공부한 보람이 느껴졌다. 공사가 끝나고 겨우 보름 정도의 여행. 그 여행만을 위해서 익혀둔 터키어였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쓸 일이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더 터키에 오리라.

인자한 표정의 경비 아저씨와 작별을 하고 모스크를 빠져나왔다. 모스크의 출구가 있는 곳엔 마을 시장이 바로 접해 있었다. 그랜드 바자르도, 이집션 바자르도 아닌 그저 동네 시장. 그러나 지금의 내게는 아야 소피아 못지않은 구경거리였다.


시장엔 도대체 어디 갔나 싶었던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문을 닫은 가게도 없어서 모든 것에 생명력이 넘쳤다. 길바닥에 앉아 집에서 직접 만든 듯한 순무 음료를 페트병에 담아와 팔고 있는 여자들은 지나가던 행인을 세워놓고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가게에 잔뜩 펼쳐놓은 달콤한 간식거리(한국의 시장 떡집과 비슷한 풍경이었다)들은 나름대로 터키 디저트를 먹고 다녔다고 생각하는 내 눈에도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 활기차고 떠들썩한 분위기는 마치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던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삭막한 분위기와 전혀 달라 보였다. 문을 닫은 가게들과 인적이 드문 보도, 아무런 표정 없이 조용히 자기 갈 길만 가던 행인들. 그런 스산했던 풍경들은 모두 어떤 연극 무대 같은 게 아니었을까. 나는 두 장소가 같은 도시의 풍경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여긴 코로나(마스크는 다들 쓰긴 했지만)도, 라마단도 없는 것일까.

현지인들의 일상에 섞여들어 한참을 걷다가 도착한 곳은 어느 유제품 가게였다. 실은 이곳으로 방향을 정했던 것도 이 가게 때문이었다. 내가 먹었던 그 카이막보다 더 맛있는 카이막이 있다는 가게. 그것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내 발걸음에 부여한 최소한의 이유였다.


완고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주인아저씨의 얼굴은 이곳 카이막의 맛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 주었다. 어디서 왔느냐, 터키어는 어디서 배웠느냐, 그런 종류의 대화는 전혀 없이 우리는 돈과 물건만 담백하게 교환한 채 작별했다. 그것은 내가 선호하는 여행에서의 교류법이었다.


내 여행엔 언제나 사람이 없었다. 음식과, 사물과, 나. 나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특히나 해외여행을 다니면서는 더욱 그랬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음식에 대한 추억, 숙소에 대한 추억, 길에 대한 추억은 있어도 사람에 대한 추억은 거의 없었다. 같은 숙소의 외국인 친구, 어쩌다 보니 친해진 가이드 같은 건 물론이고, 하다못해 식당 주인에게 음식이 맛있다며 엄지를 척 지켜든 적조차 없었다. 그런 내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내게 말을 거는 사람도 딱히 없었다. 덕분에 사진에 담기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 아닌 것들, 혹은 풍경으로서의 사람뿐.


그러나 나는 아까 모스크에서 만났던 경비와의 짧은 대화를 기억했다. 그것은 내 여행에서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이벤트였다. 조금은 바뀌고 있는 걸까. 나는 어쩐지 그것이 터키여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가 아닌 두 번의 우연한 계기로 인해 나는 터키에 왔다. 그러는 사이에 터키는 내게 가장 특별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마 예전처럼 음식이나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어떤 얼굴들부터 떠오를 것 같았다.


근처 빵집에서 카이막과 함께 먹을 에크멕 빵을 적당히 하나 구입하고는 숙소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여행지에서 택시를 타는 것은 내겐 절대 금기였지만 이번에는 돈도 열심히 벌었겠다, 터키 리라 환율도 뚝 떨어졌겠다, 힘껏 사치를 부리기로 했다. 택시 기사에게 '이집션 바자르'로 가자고 했더니 알아듣지 못했다. 발음의 문제인가 싶어서 힘껏 혀를 굴려 보았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혹시 이집션 바자르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그리고 기사에게 '므스르 차르슈'라고 했더니 그제야 알아듣고 엄지를 척 보이며 기사는 택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소한 대화를 나눈 뒤에 그는 내가 터키어를 꽤나 할 줄 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말을 쏟아내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걸 다 알아들을 능력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격류에 흘러가는 잔해처럼 몇몇 단어들만 간신히 건져낼 뿐이었다. 영화, 전쟁, 한국, 소녀. 그는 아마도 한국 전쟁을 다룬 영화 <아일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타맘(ok)', '규젤(멋지다)'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영어를 배울 때는 분명 듣기보다 말하기가 훨씬 어려웠던 것 같았는데, 그 언어를 정말로 못하는 상태라면 오히려 말하기가 듣기보다 더 쉽다는 것이었다. 말하기는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그 단어를 말하면 된다. 감사하면 그냥 테세큘 에데림(감사합니다), 하면 된다. '당신이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줘서 나는 무척 기뻐요', 라는 말을 하고 싶으면 음식을 가리키며 테세큘 에데림(감사합니다), 하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한 마디 말을 위해서 나는 하나의 단어를 외우면 된다. 뭔가 더 복잡한 말을 하고 싶으면 손짓 발짓을 동원하거나 그냥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듣기는 달랐다. 낯선 터키어를 어디서부터가 단어고 단어가 아닌지를 분절해서 들을 수 있게 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상대방이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수많은 단어들 속에서, 내가 외워두었던 단어를 만날 확률도 무척이나 적었지만, 그걸 만나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백 개의 단어를 외우면 가끔 한두 마디 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힘들게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가는 데는 겨우 십여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삼천 원 정도의 택시비로 그렇게 빨리 숙소 근처의 이집션 바자르에 도착해버리자 좀 허탈했다.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뿌듯해하는 것 같은 택시 기사와 이별하고, 나는 이집션 바자르 근처의 가게들을 좀 둘러보았다.

구시가지라는 무대 위로 돌아오자 스산한 이스탄불이라는 연극의 막이 다시 올랐다. 생기가 없이 쓸쓸하고 고요한 거리. 나는 문 닫힌 가게들 사이에서 저녁거리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걸 파는 곳이 있는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은 밤비 카페라는 곳 앞에서 팔고 있는 쭈글쭈글한 햄버거였다. 이름을 대충 해석해보니 젖은 햄버거라는 것 같았다. 잘 팔리지 않아 찜기에 열 시간은 방치되어 있던 편의점의 쭈글쭈글한 호빵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것은 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도톰하고 평범한 번 사이에 겨우 고기 패티 하나 달랑 들어가 있는 단순한 구성도 내 취향을 저격했다. 하찮은 것 같이 생긴 이 녀석들을 세 개고 네 개고 실컷 사서 마음껏 입에 쑤셔 넣고 싶었다. 이것과 아까 산 카이막, 그리고 에크멕 한 덩이면 충분한 저녁 식사가 될 것 같았다. 적당히 쭈글쭈글해 보이는 녀석을 둘 골라 사서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달랑달랑 손에 든 것이 꽤나 많아졌다.

숙소로 돌아와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에서 수집한 음식들로 만찬을 시작했다. 백종원 카이막보다 더 맛있다던 그 카이막은 뭐랄까, 방금 우유에서 카이막을 건져 낸 것처럼 부드럽고 신선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농후한 맛이 그곳보다 덜했다. 밀크셰이크 같다고 해야 할까. 같이 넣어줬던 꿀은 평범하고 투명하게 달기만 한 맛이어서 그곳의 진한 꿀맛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동네 빵집에서 산 에크멕 빵도 좀 별로였다. 뭐 그래도 카이막은 카이막이라 맛이 없을 순 없었다.


기대를 하며 샀던 젖은 햄버거는 너무 기대했던 대로라서 조금 실망(?)해버렸다. 정말로 젖은 햄버거였다. 수증기에 흠뻑 젖은 모닝빵 사이에 작은 함박 스테이크를 소스 채 젖게 해서 빵에 스며들게 끼워 넣은 느낌이었다. 패티는 터키스러운 소고기의 맛이 났다. 생각보다 덜 자극적인 맛이라 아쉬웠는데, 두 개를 먹자니 좀 느끼해졌다. 마음처럼 세 개고 네 개고 샀다면 큰일날 뻔했다.


식사를 하고 나니 오후 5시였다. 오랫동안 걸어서 그런지 이틀치는 여행한 것처럼 피곤했다. 여행기록을 컴퓨터로 간단히 정리하는 동안 꾸벅꾸벅 졸음이 왔다. 좀 이른 시간이었긴 했지만 오늘의 여행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어둠이 깔린 늦은 저녁엔 호텔 카운터를 보던 남자가 자신의 호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자랑을 하던 루프탑에 한번 올라가 보았다. 어느 건물이건 옥상에 가까운 마지막 계단을 올라갈 때의 느낌이 좋았다. 건물이라기보다 뭔가 동굴에 가까운 듯한 분위기의 계단실. 그 계단실을 넘어 루프탑에 올라가자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몇 개 가져다 놓은 아담한 공간이 나왔다. 전구 한 알이 소극장처럼 작은 공간을 기분 좋게 밝혀주고 있었고, 빛이 미약하게 닿는 구석자리에는 이미 손님인 것 같은 남자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해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난간 근처로 가 의자를 돌려 앉았다.


확실히 그가 자신 있게 내세울 만큼 좋은 풍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은 호텔을 안내하면서도 연신 좁아서 미안하다, 낡아서 미안하다, 하는 식으로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꼭 이 루프탑에 올라가 보라고 강조를 했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물론 내겐 이곳이 좁거나 낡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신시가지의 밤 풍경을 감상하며 맨발을 슬리퍼에서 빼서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시원한 바람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기분 좋게 파고들었다. 똑같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지만, 공사장의 300m 탑 위에서 얼굴을 매섭게 후려치던 그 바람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나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카운터의 그 남자가 친구들과 루프탑으로 올라왔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여기에 왔구나, 라고 말했다. 나는 이곳이 무척 아름답다고 말했고 그는 기분 좋아했다.


그는 친구들과 옆 테이블에 모여 앉아 뭔가를 이리저리 만지고 설치하는 듯했다. 신경 쓰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진한 사과향 같은 것이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들이 물담배 하나를 두고 돌아가며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카운터의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나도 한번 피워보라는 듯 손짓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았지만 언젠가 물담배는 경험을 해보고 싶긴 했었다. 그러나 한창 유행 중인 코로나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곧 두런두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갔고 이스탄불은 더욱 반짝였다. 바람이 차가워질 때 나는 그 루프탑을 떠나 방으로 내려왔다.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워 마음에 드는 낯선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나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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