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며

花半開 酒微醉(화반개 주미취)

by 하로동선


산의 봄은 늦다.

아직 눈과 얼음은 다 녹지 않았고, 꽃은 피지 않았다.

게다가 3월은 산이 닫히는 계절이다. 건조한 계절이라 전국 대부분의 산이 통제된다. 빠르면 4월 중순, 늦으면 5월 중순까지도 입산이 막힌다. 산꾼들의 발이 묶이는 거다. 몇몇 산길은 열려 있지만, 걸어봐야 별 감흥도 없다. 겨우내 쌓인 눈은 썩어가고 꽃은 아직 이르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조망도 뿌옇다.

더 무서운 건 길이다. 눈이 녹은 것 같아도 낙엽 밑에 숨어 있는 얼음이 있다. 블랙아이스라는 이름만큼이나 기습적이다. 경험 많은 산꾼도 방심하다 낙상으로 골절을 당하는 게 이맘때다.

그래서 지리산 산꾼들은 3월이면 섬으로 간다. 중력을 거슬러 숨을 헐떡이며 오르는 산길을 버리고,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섬으로 간다.





사량도



image.png 사량도로 들어오는 여객선


남해 바다 사량도(蛇梁島)는 윗 섬(상도)과 아랫섬(하도) 사이를 흐르는 해협이, 뱀처럼 구불구불하다고 뱀 사(蛇) 자가 붙은 이름을 가진 섬이다. 윗 섬의 봉우리는 지리망산(智異望山)인데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산'이라는 뜻이다. 맑은 날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아득하게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에도 이름을 올렸으니, 바다 한가운데 섬 봉우리치고는 출세했다. 멋진 출렁다리도 있고 계단도 잘 놓여있어서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암릉이 만만찮아서 쉬운 산은 아니다. 지금처럼 등산로가 잘 정비되기 전에는 웃고 왔다가 울고 가는 산이었다.

지리망산 최고봉인 옥녀봉(281m)에는 오래된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외딴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옥녀가 아버지의 못된 욕심을 피해 봉우리 끝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다. 그 뒤로 사량도에는 혼례식에서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image.png 칠현산에서 바라본 상도와 사량해협


아랫섬(하도)에는 칠현산이 있다.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따라 봉우리 일곱 개가 연이어 솟아있는데, 지리망산과는 또 다른 맛이다. 산행거리도 길지 않고 위험한 곳도 없다. 먼바다로 조망이 열려 눈 맛도 좋다. 사량대교가 생기면서 윗 섬과 아랫섬이 하나의 길로 이어졌고, 힘 좋은 산꾼이라면 두 산을 하루에도 가능하다.

사량도 가는 배는 삼천포항이나 고성 가오치항, 그리고 용암포항에서 탄다. 용암포는 고성땅이지만, 삼천포에서 더 가깝고, 배는 사량도 내지항으로 간다.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내지항은 사량도 윗 섬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포구다. 산행 후 배를 기다리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포구에서 그날 잡은 해산물에 소주 한 잔 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욕지도



또 다른 섬 산행 명소, 욕지도는 통영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통영 여객선터미널을 떠난 배는 먼저 연화도(蓮花島)에 닿는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섬의 윤곽이 꽃잎이 겹겹이 오므린 연꽃 봉오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연화봉(212m) 정상에 서면 소매물도까지 한려수도의 섬들이 선경처럼 늘어선다. 동쪽 해안의 용머리 바위는 통영 8경 중 하나인데, 일몰 무렵, 지는 해를 받아 황금빛으로 물드는 절벽이, 숨을 멎게 한다.



image.png 욕지도 가는 길



연화도를 지나 배가 더 달리면 욕지도(欲知島)다. 욕지도라는 이름은 불교 경전 화엄경의 한 구절, '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欲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에서 왔다. 구절을 풀어보면 이렇다.


'욕지(欲知) — 연화장(蓮華藏) — 두미(頭尾) — 세존(世尊)'


극락세계(연화장)를 알고자(욕지) 한다면 그 처음과 끝(두미)을 부처님(세존)께 물어보라(問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절 속 단어들이 통영 바다의 섬이 되었다. 욕지도(欲知島), 연화도(蓮花島), 두미도(頭尾島), 세존도(世尊島). 경전 한 줄이 바다 위에 섬으로 흩어져, 통영 앞바다 한 자락이 통째로 불교의 이상향,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된 것이다. 옛사람들의 멋 부림이란!


욕지도는 화가 이중섭이 1953년에 며칠 머물며 <욕지도 풍경>이라는 작품을 남겼을 만큼 아름다운 섬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메밀잣밤나무 숲을 올라가면 화가의 이름이 붙은 전망대도 있다.

욕지도의 최고봉은 천황산(392m) 천왕봉이다.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서면 한려수도가 발아래 펼쳐진다. 섬을 한 바퀴 도는 길을 따라 바다도 보고 출렁다리도 건너며,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천황산에 이른다. 제발 배에서 내리자마자 산으로 직행하지 마시라.

양식 고등어로도 유명한 섬이라, 포구 주변 수조에서 막 꺼낸 고등어회는 섬에 오지 않고는 맛볼 수 없는 별미다.


image.png 욕지도 해안



산을 오래 다닌 낡은 산꾼들은 대부분 술꾼이기도 하다. 섬에는 산에서는 맛보기 힘든 게 있다. 싱싱한 활어회와 소주 한 잔. 견물생심이라고, 포구 횟집 수조 앞에 서면 지리산 생각은 잠깐 뒤로 밀린다. 짭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 이맘때 산꾼들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굳이 산에 못 오르면 어떤가. 산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image.png 소주 한잔


섬에는 꽃이 일찍 핀다. 3월 중순이면 섬의 매화는 이미 지고 벚꽃이 슬슬 피기 시작한다.

산은 아직 겨울인데, 섬은 벌써 봄 한가운데다.

산바람과는 다른, 짭짤하고 부드러운 바닷바람 속에서 꽃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봄이 이렇게 먼저 와 있었구나.


술에 취하고,

바다에 취하고,

봄에 취해 돌아오면,

지리산에도 봄이 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봄이 오는 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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