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 년 간의 보은

비호장군(飛虎將軍) 석상용

by 하로동선



함양 마천 추성마을은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고 벽송사와 서암정사가 있어서, 일 년 내내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크게 세 갈래의 계곡이 지리산을 타고 내려와 마을로 흘러드는데, 국골과 허공달골, 그리고 칠선계곡이다. 국골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신라군한테 쫓겨 들어와 진을 쳤던 곳이고, 칠선계곡 입구 두지터는 군량미 창고 자리라 전한다. 국골의 어름터는 얼음을 저장하던 곳이었고 말 달린 평전은 군마를 훈련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추성마을은 천오백 년 전 기울어가는 나라의 왕이 마지막으로 머물렀으니, 그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아직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곳이다.

그 마을에 석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마을 입구에 독립운동가 석상용 장군 묘소 안내판이 서 있다. 장군의 조상들은 명나라에서 왔다. 이것은 400년에 걸친 '은혜'에 관한 이야기다.


추성마을


조선 역관 홍순언이 사신을 수행하여 북경으로 가던 길에 통주 유곽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남경 호부시랑의 딸 류 씨였는데, 부모가 역병으로 죽었으나 장례비조차 없어 몸이 팔려온 신세였다. 이역만리타국에서 부모를 잃고 몸까지 팔려야 했던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 홍순언이, 가지고 있던 돈 삼백 냥을 다 털어 건네주고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그냥 돌아섰다.

류 씨는 그 돈으로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 지인이었던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집에서 병든 석성의 부인을 간호하며 지냈다. 얼마 후, 부인이 세상을 뜬 후 석성의 계비가 된다.

세월이 흘러 홍순언이 다시 북경에 왔을 때, 예부상서가 된 석성과 류 씨 부인이 홍순언을 찾아와 비단에 '보은단(報恩緞)'이라 수를 놓아 선물했다.



칠선계곡


이런 인연 때문인지, 임진왜란이 터지자 석성은 명나라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병을 주장하여 군사 5만을 조선에 보낸다. 그러나 석성은 그게 빌미가 되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석성의 제자가 조선에 찾아와 스승을 구해달라 빌었지만 조선 조정은 끝내 외면했다. 성호 이익은 이걸 두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린 배은망덕'이라고 탄식했다.

석성은 죽기 전 아들 석담(石潭)에게 조선으로 망명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석성의 죽음을 외면했던 조선 조정은 석성의 가족만큼은 받아들이고 보살폈다. 선조는 이들에게 '해주 석 씨' 성을 하사하고 전답과 가옥을 내려 정착을 도왔다. 명나라를 멸한 청나라가 석성의 후손들을 돌려보내라 압박하자, 광해군은 핑계를 대며 버티다가 그들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김해로 옮겨 살게 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산청과 함양 추성으로 흘러 들어온 후손들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조용히 뿌리를 내렸다. 석상용(石相龍) 장군은 석담(石潭)의 13대 후손이다.

장군은 지리산에서 곰을 잡던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조선을 침탈한 일제 경찰이 사냥꾼들의 화승총을 수거하고 탄압하자, 1907년 마천면에서 뜻이 맞는 사냥꾼들과 주민 50여 명을 모아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실상사·쑥밭재·벽소령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인 장군을 사람들은 '비호장군(飛虎將軍)'이라 불렀다. 결국 일본군에게 붙잡힌 장군은 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추성 인근 허공달골에 있다.



칠선계곡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다. 홍순언의 삼백 냥이 류 씨를 살렸고, 류 씨의 심성이 석성을 움직였다. 석성의 파병이 조선을 살렸고, 조선이 품은 석담의 후손이 지리산에서 의병장이 되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돌아섰던 역관의 마음이, 사백 년을 흘러 여기까지 온 셈이다.

장군의 후손들은 아직도 산청과 함양 일대에 살고 있다.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던 석재규 씨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왕등재 습지 아래 고향 쌍재 마을로 돌아왔다. 기골이 장대하고 호걸풍이라, 딱 봐도 무장의 후손이다. 길이라고 해봐야 비포장 임도 밖에 없는 그곳에서, 조용히 살던 그의 집 마당을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게 됐다. 사람들이 마당 앞을 오가니, 수도를 제공하고 화장실을 쓰게 했다. 그러다 텃밭 한편에 작은 쉼터를 만들어 사람들을 쉬어가게 했다. 조상의 보은을 후손이 아직도 실천하고 있다면 과장일까.


지리산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리산을 떠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