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적자(赤字)
내 친구는 빨강을 무척 좋아한다. 배낭도, 바지도, 재킷도 늘 빨강이다. 칙칙한 무채색 일색인 나는 '보호색'이라 불리는데, 레드로 치장한 친구는 그냥 '빨갱이'다. 내가 20년을 봐 온 빨강 바지는 이제 허리가 늘어지고 바짓단이 헐어서 제 기능을 잃었지만, 아직도 친구는 그 바지를 애착한다.
어떤 취미든 실력이 느는 속도보다 옷과 장비가 느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내 실력이 제자리걸음인 게 장비 성능이 떨어져서인 것 같기도 하고, 유행에 뒤처진 장비가 실력을 가린다는 핑계를 대기도 한다. 새 옷과 장비를 장만하면 실력이 조금 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내가 봐 온 20년 내내 참 꾸준하다. 새 장비는 스타일이 달라져도 빨강이고, 새 옷은 브랜드만 다르지 레드다.
주말에 그 친구가 나타나면 다들 이구동성으로 빨강을 확인한다. 늘 한결같은 빨강이지만 우리도 늘 한결같이 그 친구의 빨강을 확인하고 놀리고 웃고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후배가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을 올렸는데, 범상치 않은 패션으로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 그대로 'All Red!'다. 머리카락은 붉게 염색했고, 붉은 셔츠는 깃을 세워 강조했다. 불끈 쥔 주먹은 붉은 장갑이라 더 극적이고, 타이트한 바지는 붉어서 더 민망했다. 화룡점정은 신발인데, 등산화도 아니고 붉게 칠한 고무신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너도나도 같이 찍자고 줄을 선 모양이다.
우린 박장대소하며 친구를 놀리기 시작했다. 원조인 줄 알았더니 원조는 저기 있네! 알고 보니 사이비 빨갱이였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며, 산행 내내 수시로 화제에 올렸다. 지리산 원조 빨갱이가 이렇게 허무하게 밀려서 되겠냐며, 다음 주엔 빤스까지 빨갛게 입고 오라고 성원했다.
처음에는 빨강만 고집하는 이 친구가 뭔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20년 세월을 겪어보니, 이유를 알만했다. 이 친구는 한마디로 '산사나이'다. '빨갱이'라는 놀림도 우리 팀만 하는 소리지, 다른 산꾼들은 이 친구를 진정한 산사나이로 인정한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체력과 느긋한 성격으로 누구보다 산을 잘 타고, 많은 산악 모임의 대장을 맡아 꿋꿋이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도 좋다. 수 십 년 이끄는 산 모임이 많다 보니 일 년 내내 바쁘다. 산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배낭을 열어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곤란한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고 불편을 감수한다.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고 술 한잔 나눠야 한다며 무거운 부식을 배낭에 늘 넘치도록 챙겨 온다. 내가 힘들어도 남이 행복해야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다.
친구는 정도 많다. 눈물도 많다. '고모부' 장례식장에서 울다 지쳐 응급실에 실려 가고, 평소 개를 싫어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후배의 반려견이 죽었다고 대성통곡을 한다. 친구는 사람을 좋아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들을 아끼고, 모르는 사람도 무조건 좋아한다.
삶의 열정이 넘치는 이 친구에게 '빨강'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색깔은 없었다.
'레드'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이지만, 우리 언어에서 빨강은 긍정보다 부정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사랑 고백에 볼이 '붉어'지거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레드'카펫이 깔리는 건 멋진 일이지만, 건강에 '빨간'불이 켜져서는 안 되고 재정 상태는 '레드'라인을 넘지 말아야 한다. 적자(赤字)는 '빨강 글자'라는 뜻인데, 우린 이걸 손해로 이해한다. 어쩌면 내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적자를 보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적자는 많은 사람들의 흑자로 돌아온다. 친구가 사랑으로 키운 자식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늘 앞장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친구 덕분에 우리 팀은 항상 넉넉하고 유쾌하다.
내 친구는 세상에서 '빨간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