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 위에 서면

산이 좋아, 산이 된 사람들

by 하로동선




노고단 고개를 내려서 반야봉 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 숲 속에 ‘조난 산악인’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낡은 나무 기둥 하나가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 간다.

수십 년 전 겨울, 지리산 종주에 나섰던 세 명의 고등학생이 노고단 대피소까지 1km 정도를 남기고 추위와 탈진으로 쓰러져 사망한 곳에, 구례의 ‘연하반 산악회’ 회원들이 그들을 추모하며 세운 것이다. 지금은 ‘조난 산악인’이라는 글자만 남았지만, 원형에는 ‘비목 조난 산악인’이라는 일곱 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리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가장 안타까운 죽음의 기록이 있다.





지리산 남부 능선, 청학동을 내려다보는 큰 바위 하나가 등산로를 비켜서 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는 곳이다. 늘 호젓하다.

그 바위 곁에, 세월의 흔적을 새기며 녹슨 동판이 하나 있다. 지리산을 사랑하다 지리산에 영혼을 묻은 아들을 그리며, 가족이 남긴 것이다.





지리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고단과 천왕봉 사이에 몰린다. 주능선이라고 부르는 그곳을 벗어나면 지리산은 한적하고 고요하다. 중봉을 지나 써래봉으로 내려가는 주능선을 벗어나, 하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은, 수십 년째 비법 정탐방로로 묶여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었다.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하고 반야봉이 눈을 맞추는 봉우리에, 지리산을 제 집처럼 누비던 부산 사나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바위가 있다.





장터목 아래 깊은 계곡은 한신지곡이라 불린다. 백무동에서 세석으로 오르는 한신계곡의 지류라는 의미이다. 이곳도 이제는 폐쇄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원래는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가내소 폭포 앞 삼거리에서 갈라져 장터목 대피소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었다. 호젓한 계곡을 세 시간여 오르면 장군대라는 큰 바위 아래 함양폭포를 만나는데, 그 벽에 40년 전 새긴 동판이 있다. 어느 여름날 산악연맹 대원들과 같이 지리산에 왔던 여고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새겼다.






만복대는 지리산 서북 능선에서 가장 넉넉하고 포근한 봉우리다. 봉우리라기보다는 펑퍼짐한 언덕같은 그 언저리에, 팔뚝만 한 굵기의, 사람 키보다 조금 더 큰 높이에 꼭대기엔 나무 기러기가 올려진 비목이 서 있었다. 지리산을 사랑했던,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는 지리산을 걷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 이를 기억하며 세운.

비목은 몇 년 전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흔적은 산이 아니라 온라인에 남았다. 그 사람의 블로그엔 글과 사진과 마음이 아직도 살아있다.



‘마음, 변할 수도 있지. 2006.11.02.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던 밤은 지나가 버렸다, 어느새.’



*언니..아직도..모든 게 믿기지 않네.*



능선 위에 서서, 영원히 떠나버린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기억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