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 넣고 저희끼리만 저만치 등 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스무 살을 복기할 때마다 나는 항상 이 문장을 떠올린다. 김연수의 <스무 살>의 첫 장. 그건 이 문장들이 나의 스무 살을 그려낸 명징한 수채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연 나의 스무 살은 여느 날들처럼 빠르게 지나갔지만, 내 삶에서 어느 때보다 아리게 반짝이던 순간으로 남아 있다. 문득 돌이켜 생각하다 보면, 스무 살 이후의 나날들이 모노톤으로 느껴질 만큼.
스무 살의 하늘과 바람, 그리고 눈빛을 복기할 때마다 기억나는 음악이 있다. 바로 가을방학이다. 스무 살 내내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스무 살의 나는 가을방학의 가사에 유독 취약했다. 겨우 어린애 딱지를 뗐지만 여전히 멍은 들어 있었던, 그래서 때로 철없이 아팠던 날들. 처음 취하고 처음 사랑하는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오래된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동안, 가을방학을 하염없이 들었고 그때마다 계피의 목소리는 내 마음을 울리곤 했다. 송도의 밤하늘 아래에서, 한강 너머의 반짝이는 밤풍경을 바라보던 버스 안에서, 불을 끄고 누운 침대 위에서.
스무 살, 나를 가장 아리게 했던 가을방학의 곡들을 소개한다. 언젠간 돌아오지만 늘 모르는 새에 지나가버리고 마는 세 번째 계절을, 원래는 없는 그 계절의 방학을 노래하는 그들은, 그 노랫말에 어떤 세계를 담아냈을까.
끝내 지울 수 없는 사랑에 관하여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냐
수업이 많은 나날들 속을
반짝이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너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 세상 속에
가을방학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을 이 노래는, 제목에서부터 마음을 울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건 누구에게나 한 명쯤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미치도록 안고 싶어지는 사람이,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 실제로 유투브에서 이 곡의 영상 댓글을 보게 되면, 소중한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댓글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러한 상황을 댓글에서 술 냄새가 난다고 칭할 만큼.)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는 가슴 속에 간직하던 어떤 마음을 뒤늦게나마 고백하게 만든다. 그것이 가을방학의 서정성이 지닌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브나
난 절대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너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
행복함에 눈물 범벅이 될 지라도
너 하나로 숨 막힐 바보는 안 될 거야
그렇겐 안 될 거야
정답지도 살갑지도 않던 눈동자
그 까만 색이
난 못내 좋았는지도 몰라
넌 절대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나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
유채꽃 금목서 활짝 핀 하늘 아래
나 하나로 듬뿍한 바보는 안 될 거야
그렇겐 안 될 거야
<이브나>의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건 상대로부터 들은 다짐이기도 하고 스스로 내리는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식은 커피같은 나의 고백" 후에 들은 상대의 아픈 말이 시리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어느 날엔가 겪었을 어떤 아픔이 그 말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너 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라는 말에는, 바보가 된 채로 홀로 남겨졌던 날의 쓰린 기억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유채꽃 금목서 활짝 핀 꽃 아래 나 하나로 듬뿍한 바보'가 된 상대를 상상해 본다.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건 끝내 지울 수도, 줄일 수도 없는 사랑의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는 혼자만 외로운 연애래도, 그 연애를 결단코 시작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버스 정류장에는, 사랑의 생(生)을 기대하는 사람과 사랑의 사(死)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별의 언저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사들
사하
처음 안았을 떄부터
난 깨달았지 똑똑히
두 사람의 심장에는
온도 차이가 있단 사실을
진심이면 충분하던
예쁜 시절은 지나고
나로 돌아와
미안하단 얘기도
미안하기만 한 나로
두 뺨으로 흘러내려
뾰족하게 얼어붙은
앙금들이 침묵을 찔러
또다시 차가워진 손을 뻗어
떨다 파래진 입술로 말해
그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도 놓지 않아
가을방학의 2집 <세 번째 계절>에는 유독 이별 언저리의 감정들을 노래하는 곡이 많다. '사하'는 시베리아의 연방 자치 공화국으로,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나라다. 가을방학은 '처음부터 온도차가 있던 연인이 이별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려냄에 있어 '사하'를 모티브로 인용한다. 1집의 <속아도 꿈결>에서 산책길의 즐거움을 표현하면서 이상의 '봉별기'를 끌어왔던 정바비의 센스가 다시 한 번 돋보이는 순간이다.
진심도, 사과도 휴지조각에 불과해지는 사랑의 끝. 얼어붙은 관계와 감정들은 '사하'와 같은 온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노래의 말미에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젠가 두 심장의 온도가 만나게 될 거야 / 비참만이 참이었던 날들 너머 / 또다시 차가워진 손을 잡아 / 떨다 파래진 입술로 말해 / 그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 나도 놓지 않아 그댈 놓지 않아.' <사하>의 화자는 사랑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그 마음이 내게는 너무나 애틋하게 느껴진다.
난 왜 가방에서 낙엽이 나올까
한 때 비를 막아주었던
저 나무 아래 흩어져 뒹구는
말의 잎사귀들
'사랑한다'를 가장 먼저 떨치고
'보고 싶다'는 조금 망설였지만
'네가 필요하다'도 '너 없인 안된다'도
어렵지 않게 떠나보내고
마음속 낙엽 모두 털어냈는데
어쩐지 가방 한 귀퉁이엔
아무리 해도 지울 수 없는
1건의 메세지
가을방학을 사랑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대답하라면, 나는 이 곡으로 답하고 싶다. 가을방학의 음악에는 언제나 '명징하게 아름다운 노랫말'이 있다. 한때 나를 지탱하고 가꾸어 주었던 헤어진 연인의 말들을 정바비는 이렇게 표현한다. '한 때 비를 막아주었던 저 나무 아래 흩어져 뒹구는 말의 잎사귀들.' 가을방학의 가사는 잊고 있던 언젠가의 우리를 투명하게 비추고, 그렇기에 나는 곡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곱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곡을 처음 들었던 스무 살의 나 또한 가방 한 귀퉁이에 한 건의 메시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도저히 지울 수 없을 것만 같은 소중한 문장들을 가슴에 숨겨 두고, 버스에 앉아 오묘한 색의 하늘을 바라보며 이 곡을 듣고 또 들었다. 이 곡은 그 순간의 인장으로서 아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별 앞으로
앞으로
이별 앞으로 한걸음
잿빛 계절 속으로 한걸음
세상이 등 뒤로 무너지네
또 깨어진 맘으로 한걸음
벌써 못 견디네
너 없이 수없이 가야만 하네
너 없이 수없이 살아야 하네
<난 왜 가방에서 낙엽이 나올까>가 이별 후 삶을 수습하는 과정에서의 덤덤한 슬픔을 그려냈다면, <이별 앞으로>는 이별하는 순간의 무너지는 슬픔을 그려낸다. 이 노래 속 '세상이 등 뒤로 무너지네', 그리고 '너 없이 수없이 살아야 하네'라는 가사는 무척이나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맴돌았다. 이별의 감정을 이보다 명징하게 표현하는 가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막 이별을 마치고 이 노래를 듣는 나를 상상한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잿빛 계절을 목전에 둔 채로 막막한 마음일까. 의외로 담담한 마음일까. 그 순간 이후의 나는 여전히 이 노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덤덤한 쓸쓸함을 노래한다는 것
근황
만남이라는 사치를 누리다
헤어짐이라는 오만을 부린 우리
한 사람이 떠나갈 땐 참 많은게 떠나
그댄 잘 지내나요 난 별 일 없는데
정말 행복한가요 난 울고 있는데
멀어진 그대 모습이 이토록 슬픈 건
한때는 그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이기에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근황>은, 단연컨대 가을방학의 음악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곡이다. 노랫말 하나하나가 스무 살의 내 마음을 여러 번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아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동안,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했던 사람과 멀어지는 일도 가끔 발생했다. 쓸쓸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노래를 들었다. 같은 감정으로 <근황>을 듣고, 같은 이유로 <근황>을 좋아하는 주변인들이 많음을 알았을 때는 퍽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 비슷한 스무 살을 보냈구나 싶어서.
정바비는 <근황>의 탄생 비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어떤 책에서 근황(近況)을 한자로 써놓은 것을 보다가, 문득 황(況)을 흐리고 거칠다는 의미의 황(荒)으로 바꾼 단어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온통 시야가 흐리고 황폐해져 자신이 지금 어디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하겠죠. 그렇다면 단어는 소중한 사람이 떠난 후의 마음 풍경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 곡의 아이디어가 되었습니다." 과연 <근황>은 누군가의 쓸쓸하고 흐린 마음 그 자체로 느껴진다. 그러나 결코 감정을 과잉하지 않고, 덤덤하게 노래한다. 그 덤덤한 쓸쓸함이 소중한 것들을 모르는 새에 잃어왔던 우리를 더 진하게 울리는지도 모른다.
가을방학의 음악은 때로, 스무 살의 나에 대한 요약집처럼 느껴진다. 나를 세월 속으로 밀어 넣고 저희끼리만 저만치 등 뒤에 남은 스무 살의 하늘과 바람과 눈빛 속에서는, 계피의 음성과 정바비의 노랫말이 아른거리고 있다. 영원히 사랑할 이 음악들을 다시금 들으며, 스무 살의 기억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영원히 그 자리에서 오래 빛나길 소망하며.
2018년 9월 말,
여름과 가을 사이의 애매한 계절에
몽상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