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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07. 2019

[유월] 핸드드립커피, 혹은 취향 입문자를 위한 가이드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중독이다.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는 물론이고, 칼바람이 불어 손의 감각이 실종되는 날씨에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은 포기하지 못한다. 롱패딩에 장갑까지 끼고도 두 손에 꼭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쥐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그렇게 좋냐'라고 묻곤 한다. 내가 변태가 아닌 이상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고통을 감수할리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담쟁이에 '아메리카노'를 소재로 글을 쓰지 못한 이유는 지금도 내 옆에서 찰랑거리는 저 까만 물질이 과연 내 '취향'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메리카노 소비 양상은 흥미와 맛, 그리고 향유보다는 다분히 관성과 습관에 의존한다. 잠을 깨려고 마시고, 입이 심심해서 마시고, 목이 말라서 마신다. 날이 좋아서 마시고 날이 좋지 않아서 마시고 날이 적당해서... 마신다. 어쨌든, 취향이라기보다 다분히 습관에 가까운 이 소비를 나의 '취향'이라고 이름 붙일 순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좋아하는 듯 보이는' 습관 말고 언젠가 나의 마음에 들어온 '우연한 취향'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취향은 어느 날 '우연히' 아메리카노를 팔지 않는 동네 작은 카페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나는 또 '우연히' 메뉴를 고르기 전 화장실에 갔고, 돌아왔을 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핸드드립 커피 종류가 줄지어 적혀 있는 메뉴판, 이미 메뉴를 고르고 휴대폰을 보고 있는 엄마, 그리고 다음 주문을 기다리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의 바리스타님이 있었다. 나는 아직 모르는 걸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지 못한 터라, 얼굴이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를 눈치챘는지, 바리스타님은 오늘의 커피를 권하고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처음 마셔본 커피는? 과연 어땠을까. 

지금에서야 취향이 된 '핸드드립 커피'는 아직 나에게 많이 어렵고 또 나는 겨우 입문자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의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취향(趣向)은 결국 나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니까. 또, 한눈에 반하는 취향이 있는가 하면, 우연한 기회로 만나 천천히 마음을 열어가는 취향도 있는 법이니까. '나는 취향이 없어'라고 한탄하는 누군가에게, '취향'을 만들어간 나의 이야기와 '취향'에 입문하고자 하는 당신을 위한 가이드를 전한다.

*주의*
필자는 핸드드립 커피 전문가가 아닌, 입문자이며 아래 소개된 커피들의 향과 맛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여 쓰였습니다.

첫 만남,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첫 만남. 두둥!


무엇이든 처음은 어렵고 두렵지만, 그때의 경험과 감각은 오래도록 기억나는 법이다. 나의 무려 '첫 핸드드립 커피'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였다. 위에 첨부된 애매하고 동떨어진 듯한 커피잔의 사진이 당시 나의 당황스러움과 정신없음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플라스틱에 대충 휘휘 담겨 나오는 나의 친구 아메리카노와 달리, 예쁜 찻잔에 담겨 나온 그것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마셔야 초보자인 티가 나지 않을까 하면서 최대한 고급스러운 손짓으로 한 모금을 마셨다(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마신 후에 혀에 무지개가 펼쳐지며 감동의 눈물을 흘려야 하겠지만, 첫 모금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신 후 온갖 인상을 쓰며 혀를 내밀고 엄마를 쳐다봤는데, 금세 나를 보는 바리스타님의 시선이 느껴져 머릿속으로만 수많은 물음표를 그렸다. 우선 그동안 먹던 커피의 맛이 아니었고, 커피로 둔갑한 식초 같았다. '이거 상한 거 아니야?'라고 묻자, 엄마는 그게 바로 '산미'라고 했다. 

산미는 말 그대로 커피에서 나는 '신맛'인데, 커피를 오래 즐기고 커피 맛을 잘 느끼는 사람일수록 산미를 선호하며 그렇기에 산미가 잘 느껴지는 커피일수록 맛있는 커피로 칭한다고 한다. 어쨌든, 나에게 '산미'는 그냥 '신맛'이었고 결국 반 이상을 남긴 채 가게를 나왔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의 귀부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세련된 맛을 가진 커피라고 평가된다. 유명하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커피 종류 중 하나이며 에티오피아에서 재배되는 커피들이 모두 그렇듯 산미가 강하다. 초보자에겐 어려운 커피지만, 조금만 익숙해진다면 '톡 쏘는'(진짜 톡 쏨) 신맛과 함께 베리류의 과일향, 그리고 꽃 향(아로마)을 느낄 수 있다. 


+) 소소한 팁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원두 생산지의 이름을 따 지어진 이름이다. 가끔 카페에 가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말고 '에티오피아 모카 예가체프 코케' 등, 더 긴 이름을 가진 커피가 있는데, 결정적으로 둘은 같은 종류의 원두지만 후자의 경우 원두를 재배한 농장의 브랜드 네임이 첨가되었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하면 전자의 경우 생산 농가가 불분명한 원두, 후자의 경우 이름 있는 농장에서 생산된 원두라고 보면 된다. 대부분 그래서 커피의 이름은 길면 길수록 좋다. 참고하시길.


아이스를 포기할 수 없어서, 에티오피아 모모라


아이스 모모라 두 잔과 사장님이 직접 말리신 배칩.


새가 독이 든 개구리를 먹고 다시는 개구리를 잡아먹지 못하는 것처럼 첫 경험은 학습을 낳는다. 일단 핸드드립 커피와의 첫 만남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다시 그 카페를 찾지 않게 만드는 이유였고, 그와 더불어 핸드드립은 꼭 따뜻하게 마셔야 해!라는 우리 엄마의 고집도 한몫했다. 나는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넣고 싶지 않은데, 마주 앉은 사람이 내 설렁탕에 빨간 국물을 부으려고 하면 화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핸드드립 커피는 나와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엄마의 고집에 못 이겨 다시 한번 용기를 내 그 카페를 찾았다. 그리곤 당당히 '아이스로 주세요!'를 외쳤다.

마침 바리스타님이, 오늘의 추천 아이스 메뉴를 칠판에 적어 놓으신 터라 '에티오피아 모모라 아이스'를 주문했다. 이제 좀 괜찮겠지.. 하고 맛을 본 순간 역시나 또 새큼한 맛이 혀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두 번째여서 그런지 처음 새콤한 커피를 마셨을 때보단 한결 편했고, 나중엔 혀끝에 남는 달달한 캐러멜 맛까지 느낄 수 있었다. 꽃 향도 슬쩍 나는 듯했다. 

모든 '취향'이 단숨에 끌리는 느낌부터 시작되는 건 분명 아니라는 걸 느꼈다. 첫 만남이 다소 어색하고 어려웠어도 두 번째 만남의 기회를 주는 것. 그게 어쩌면 '취향'을 만드는 시작이 아닐까. 또 남들이 다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방식을 당당히 찾아 나간다면 어느새 당신만의 취향이 만들어져 있지는 않을까. 예가체프가 나를 배신했지만 아이스 모모라로 핸드드립과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었던 나처럼. 겨우 용기를 내 시작했지만, 생각과 달라 다시는 도전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면 오늘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겠다.

[에티오피아 모모라]
예가체프와 함께 에티오피아에서 온 원두다. 예가체프만큼 대중적이진 않지만, 개인적으로 모모라쪽이 더 좋았다. 적당한 산미와 적당한 단맛이 기분 좋았다.


나의 취향을 찾다. 인도 몬순 말라바르


아름다운 찻잔.


조금씩 커피의 산미에 적응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이를 '맛있다!'라고는 할 수 없는 애매했던 때에 새로운 종류의 원두를 도전했다. 이는 '몬순'이라고 칭해졌는데 단숨에 인도 지역에서 나는 커피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몬순은 인도 지역의 기후를 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실제로 원두의 이름도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지금까지 중에 첫인상이 가장 좋은 커피였다. 바리스타님이 아끼는 잔에 고이 담겨 나온 몬순은 왠지 기분 좋은 향을 풍기고 있었다.

첫 모금. 아마 나의 취향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새큼한 맛이 혀를 톡 쏘지 않았다. 그래서 한결 따뜻한 느낌이었고 혀를 감싸 안는 맛이었다. 그리고 곧 넓게 펼쳐진 숲과 흔들리는 나무들이 생각났다. 나무뿌리, 비에 젖은 흙, 흔들리는 잔디라든지 폭풍이 치기 전 습한 바람 냄새라든지 그런 향이 났다. 고소하고 달달하지만 어딘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커피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적당한 쓴맛까지. 내 잔을 다 비우고, 엄마 잔까지 뺏어 마신 후에야 '참 맛있다'를 외칠 수 있었다. 

취향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어 조력자의 존재는 큰 힘이 된다. 만약 엄마와 카페의 바리스타님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꼭 맞는 원두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취향을 처음 도전하려는 당신. 그 취향을 가진 이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다. 또한, 그 취향의 모든 게 나와 꼭 맞지 않더라도 자신의 취향이라고 당당히 밝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발라드를 싫어하고 락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처럼. 단순히 당신의 마음이 향하고, 자꾸만 찾게 된다면 그게 바로 당신의 취향일지도.

[인도 몬순 말라바르]
흔히 커피는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에서만 생산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도의 원두도 굉장히 독특한 향과 맛을 낸다. 이 원두의 탄생에는 독특한 에피소드가 있다. 유럽에 인도 커피를 수출하던 중 많은 양의 원두가 선박에서 해풍을 맞아 장기간 습기에 노출되었는데, 그 향이 굉장히 독특했고 그 맛을 잊지 못해 강제적(인위적)으로 습한 몬순 바람에 원두를 말리던 것이 지금의 몬순 말라바르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산미가 약한 커피로도 불리니, 커피의 산미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전해볼 만하다. 젖은 흙의 향과 함께 인도에 널리 펼쳐진 숲을 느낄 수 있다.


다시, 취향


처음 갔던 그 카페의 유리 창.
바람의 향과 함께


아메리카노에겐 미안하지만, 분명 핸드드립만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 핸드드립은 이야기와 감정을 품는다. 처음 커피 잔이 나왔을 때의 설렘, 마시고 난 후의 느낌과 맛에 대한 고민, 그리고 잔을 비운 후의 만족감까지. 그리고 핸드드립은 주문하면 1분 만에 나오는 아메리카노와는 달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약 6-7분의 시간 동안 나누는 바리스타님과의 대화, 원두에 대한 설명, 그리고 마시는 법에 대한 가이드까지. 여러모로 마음 깊은 곳까지 채우게 하는 매력들이다.

이 글은, 사실 당신이 도움을 받을만한 '핸드드립' 입문서는 아니다. 더 전문적이고, 재미있는 입문서들이 충분히 많으니까. 하지만,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취향' 입문서이긴 하다. 담쟁이를 약 10개월간 계속하면서, 주위에 취향이 없다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시작할 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껏 정말 다양한 종류의 취향을 배설하고 있는 나를 보며, 취향은 그리 어렵고 복잡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취향을 만들어간 일련의 과정들이 당신의 취향 형성과 배설에 있어 미약하더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 글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는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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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취향을 응원하며,
유월 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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