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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14. 2019

[재인] 유일과 영원의 사랑 소설, 어린 왕자

* 이 글에는 생 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린 왕자를 다시 읽게 된 것은 꽤나 우연적이고 충동적인 일이었다. 스물한 살 여름이었다. 집에서 책장 정리를 하다, 원래 그런 색이었을지 아니면 누렇게 바랜 덕이었을지 헷갈릴 지경인 미색 표지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말만 아날로그 감성인 동시대의 물건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시간의 각질이 느껴졌고 그것에 끌려 몇 장을 뒤적이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책을 덮었다. 그뿐이었다.

  소년 시절의 내가 읽은 어린 왕자는, 메마르고 어리석은 어른들에게 순수한 어린 왕자가 전하는 교훈 동화였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분명 이것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연애 소설인 것이다. 인물들을 아예 사람으로 바꾸어 쓴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그러나 그래서 훨씬 그립고 아쉬운 이야기. 바라건대 온 사람들이 이 연애 소설의 어린 왕자를 새로 사랑하기를.



  지금부터 지구의 비행기 조종사와 B612호의 어린 왕자, 그리고 뱀과 여우와 양과 꽃의 사랑 소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소설인, <어린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A. 조종사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 세 번이나 구경했어!"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저씨... 몹시 쓸쓸할 땐 해지는 풍경을 구경하고 싶어져...." "그럼 마흔 세번이나 해지는 풍경을 구경하던 날은 그렇게도 쓸쓸하더냐?" "......."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부탁이야... 나에게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이 사랑 이야기는 어린 왕자가 조종사와 만남으로써 시작하고, 조종사와 헤어짐으로써 끝난다. 조종사는 어릴 적 코끼리를 삼킨 보아 구렁이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것을 ‘모자 따위’라고 했고, 화가를 꿈꿨던 그는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 어느날 비행기가 고장나 사막에 떨어진 그는 역시 지구에 떨어진 어린 왕자를 만난다. 어린 왕자는 그의 그림을 처음으로 알아 본 사람이다. 그리고 어린 양을 그려 달라던 어린 왕자는 조종사가 네모난 상자를 그려 주자 만족스러워하고, 조종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양을 그려 달라고 했던 일처럼 말이다. 자신에 대한 질문에는 동문서답으로 일관하기 일쑤지만, 한번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절대 지나치는 일이 없다. (내 취향을 늘어놓기로 한 시공간에서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을 늘어놓지 않는 이에게는 막연한 애착과 동경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더욱이 어린 왕자는 자신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이였으니까. 그래서 조종사는 6년 후에도 그를 위해서 물감 상자와 연필들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사막은 아름다워. 어린 왕자의 말에 조종사는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막을 자신도 좋아한다고 가만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이 침묵 속에 무언가 빛나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을 즈음, 어린 왕자는 그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둘 모두는 알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 장황하게 설득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어린 왕자가 조용히, 아저씨가 나와 여우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난 좋아, 한 마디를 고백했을 뿐이었다.

  이 무렵, 조종사는 어린 왕자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에 대해 알 수 없는 부분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그저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에게 어린 왕자를 더 아름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 혼자만이 간직하는 비밀, 다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가 그를 더 소중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어린 왕자에게 설명을 보채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당신에게도 어린 왕자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냥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 아니 이해하지 않은 채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고
그저 믿어 주면 되죠
- Urban Zakapa, River -


B. 여우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우는 말했다. "아아!... 난 울 것만 같아." "그건 네 탓이야. 나는 네 마음을 괴롭힐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런데 네가 길들여 달라고 그랬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울려고 하면서!"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래 그건 정말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러니 넌 이익 본 게 아무것도 없구나!" "이익 본 게 있지, 밀밭의 빛깔 때문에 말이야."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아쉬워질 거야. 내게는 네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네게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지구의 장미 정원을 본 어린 왕자는 ‘고작 하나뿐인’ 자신의 장미꽃을 생각하며 풀밭에 엎드려 운다. 그러나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는 일이라고. 네가 나를 길들여 준다면ㅡ 나는 두렵기만 했던 발자국 소리와는 다른, 음악 소리 같은 너만의 발자국 소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빵을 먹지 않아도 밀밭을 보며 너의 금빛 머리칼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단지 그래서 밀밭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좋아질 것이라고.

  어쩌면 길들인다는 것은 상대방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게 머릿속 절반이 나만 알 수 있는 너의 발자국 소리로만 채워질 수도 있고, 무채색의 점에 불과했을 밀밭의 영역은 풍선처럼 부풀고 금빛으로 칠해질 것이다. 다만 그것은 유머북 뇌구조 코너에 글씨를 끄적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까다로운 작업일 것이다. 마치 어린 왕자가 멀리서 여우를 곁눈질하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그 후에야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느리고 깊고 두껍게. 대신 그 효과가 훨씬 묵직하고 단단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몇 시에 마음을 곱게 치장을 해야 할지 영 알 수가 없지 않아?"

  길들임은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진짜로’ 알게 한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의식은 어떤 날을 여느 날과 다르게 만드는 것, 관계는 생활을 해가 돋은 듯 환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네가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면, 나는 매일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세 시에는 들뜨고, 세 시 반에는 설레고, 네 시에는 안절부절하면서.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길들임이 아니었다면 전혀 아쉽지 않았을 너로 인해 붕 뜨기도 하고 축 가라앉기도 하므로, <하나밖에 없는 것>은 소중하다. 네가 아니면, 기쁨을 대체할 수도 힘듦을 해결할 수도 없으므로.

  누군가와의 만남을 한 시간, 하루, 혹은 한 달 동안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와 관계 맺지 않았다면,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절대 겨우 오후 네 시를 그렇게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또 그 기다리는 일 때문에 모든 시간이 온통 반짝거리게 된다는 것을, 다른 날들과는 다른 표정으로 울고 웃고 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곱게 치장한다는 못내 다정한 말을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몸이 아니라ㅡ 마음을 아무리 치장해도 너의 금빛 머리칼에는 한참 부족한 아름다움일 테니까.


여우가 말했다.
"잘 가라. 내 비밀은 이런 거야.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지.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잘 기억하기 위해서 어린 왕자는 되뇌었다.
"네 장미꽃을 위해서 네가 허비한 시간 때문에 장미꽃이 그렇게 소중해진 것이다."
"내가 내 꽃을 위해서 소비한 시간 때문에...."
잘 기억하기 위해서 어린 왕자는 되뇌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다."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넌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네가 책임을 지게 되는 거야. 너는 네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나는 내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잘 기억하기 위해서 어린 왕자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C. 장미꽃


"그런데 일시적인 존재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한번 물어본 것은 평생 그냥 지나쳐 버린 일이 없는 어린 왕자는 다시 물었다. "그것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염려가 있는 것'이란 말이다." "내 꽃이 오래지 않아 사라질 염려가 있어요?"


"나는 그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 꽃이 하는 말을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는 일을 보고 판단해야 할 걸 그랬어. 내게 향기를 풍겨 주고 기분좋게 해주곤 했으니까. 도망을 치지 말았어야 할 걸 그랬어! 그 어줍잖은 잔꾀 뒤에 애정이 숨어 있는 걸 알았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꽃들은 마음과 틀리는 말을 무척 잘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그 꽃을 사랑할 줄을 몰랐어."

  꽃은 고작 ‘네 개의 가시’를 가지고 어린 왕자의 별에는 있지도 않은 호랑이를 언급하며 으스대고, 다만 나는 바람과 추위에 약한데 이 별은 설비가 좋지 않다고 투덜댄다. 또 그 꽃은 속이 상하면 죽는 시늉을 하며, 간호해 주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버릴 수도 있는 이었다. 결국 어린 왕자는 ‘어떤 꽃과 말썽이 생겨’ 자신의 별을 떠났고, 그것을 영영 후회했다. 너무 어려서 사랑할 줄 몰랐다는 식상하고 구차한 말이 와닿는 것은 그가 어린 왕자라서 그렇다. 그가 중요한 순간마다 돌연히 떠올리는 것은 늘, 제 별에 두고 온 꽃 한 송이였으니까.

  어린 왕자가 떠나는 날 꽃은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보였어, 용서해 줘. 그래, 난 너를 좋아해. 나는 지은 죄가 없노라고 잡아떼는 파렴치한처럼, 영상을 판독한 후 승자를 선언하는 총심판처럼. 늘 그랬듯이, 고상하고 아늑하게. 아마 어린 왕자는 이 날의 기억 때문에 그토록 후회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떠나기로 작정했으면 빨리 떠나라고 어린 왕자를 꾸짖던 꽃은, 다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연애에서 언어로 빚어진 표현이 의무인 것처럼 취급받는 세상이지만, 언제나 진심은 꽤 쉽게 드러나고,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이다.

"꽃이 하나 있는데... 그 꽃이 나를 길들였는가 봐...."

  어린 왕자는 길들임에 대한 여우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읊조린다. 어린 왕자와 헤어지기 직전, 여우는 분명히 말한다.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너는 <영원히> 책임이 있다고. 그러나 사실 어린 왕자가 저 말을 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이야기였다. 그는 꽃을 떠올리는 매 순간에서 이미, 길들임의 감각이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이해했을 것이다. 꽃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지리학자의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 장미가 수없이 많은 정원에서 풀밭에 엎드려 울면서, 가시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조종사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고서.

  어린 왕자는 알았을 것이다. 한번 길들인 것에 대해서 서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별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지라도ㅡ 혹은 중력에서 벗어날 지경까지 도망쳤대도ㅡ 어린 왕자는 꽃에게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어린 왕자를 그리는 조종사도, 뱀도, 여우도, 양과 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길들임에서 우리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말과 동의어니까. 그래서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일 년을 버틸 수 있었고, 또 버텨야만 했던 것이다. 그 꽃과 별이 한 시절을 돌아 다시 자신의 머리 위에 위치할 때까지. 


그는 성이 잔뜩 나 있었다. 
그는 샛노란 금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말했다.
"나는 얼굴이 시뻘건 어떤 양반이 살고 있는 별을 하나 알고 있어. 그는 꽃 향기를 맡아 본 일도 없고. 별을 본 일도 없어. 누구를 사랑해 본 일도 없고. 계산 밖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온종일 아저씨처럼, '나는 착실한 사람이다! 나는 착실한 사람이다!' 하고 떠들고 있어.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고, 버섯이야!"
"뭐라고?"
"버섯이란 말이야!"
어린 왕자는 이제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백만 년 전부터 꽃은 가시를 만들고 있어. 그렇지만 양들이 꽃을 먹는 것도 수백만 년전부터야. 그러면 어째서 아무 소용도 없는 가시를 만드느라고 꽃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겠어? 꽃과 양의 전쟁은 큰일이 아니야? 바로 이것이 시뻘건 뚱뚱보 양반의 계산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아니겠어? 그리고 말이야, 만약에 내 별 말고는 다른 아무곳에도 없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내가 알고 있는데, 어린 양이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느날 아침 그 꽃을 단번에 먹어 없애 버릴 수가 있다면, 그래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냔 말이야!"
어린 왕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수백만 개 수천만 개 별 중에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다면, 별들만 쳐다봐도 행복한 거야. 속으로는, '저기 어디에 내 꽃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렇지만 양이 그 꽃을 먹어 봐. 그렇다면 그에게는 모든 별들이 갑자기 빛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야!"


A’. 다시, 조종사


"아저씨는 이제부터 일을 해야 해. 기계 있는 쪽으로 다시 가야 해.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일 저녁에 다시 돌아와." 그러나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여우 생각이 났다. 길들여졌을 때는 좀 울 염려가 있는 것이다.


'잠든 이 어린 왕자가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은 이 애가 꽃 하나에 대하여 성실한 것,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램프의 불꽃처럼 그의 마음 속에서 빛나고 있는 장미꽃의 모습 때문이다....'

 어느 날 달빛 아래 잠든 어린 왕자를 안고 길을 걷던 조종사는, 새하얀 이마, 감긴 눈,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여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 그 연약함에 대한 감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보이는 것은 껍질일 뿐이라고 되뇌인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빛나는 꽃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종사와 어린 왕자 사이 교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코끼리와 보아뱀 그림을 어린 왕자가 단번에 알아보았을 때, 아저씨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좋다고 어린 왕자가 속삭였을 때, 를 비롯한 모든 순간에 그들은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있던 것이다.

  조종사는 알고 있다. 그를 길들인 것은 어린 왕자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라는 것을. 어린 왕자가 꽃의 일로 자신에게 얼굴이 하얗게 질릴 지경까지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목이 말라 죽게 되었다는 경고에 그렇대도 여우 친구를 하나 둔게 참 좋다고 받아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린 왕자에게 이 지경까지 길들여져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왕자가 사랑에 그토록 열렬하고 착실했기 때문에, 조종사는 딱 그만큼의 열과 성을 다해서 그를 사랑했다. 여우 귀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고, 육 년이 지나도록 서투른 그의 초상화에 아쉬워하면서.

"내가 별들 중의 하나에서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 별 중의 하나에서 웃고 있을 거니까, 아저씨가 밤에 별을 쳐다보게 되면 별들이 모두 웃는 것으로 보일 거야. 그러니까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야! 그래서 아저씨의 슬픔이 가신 다음에는(사람은 언제나 슬픔이 가시게 되니까), 나를 알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될 거야.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나하고 친구로 있을 거고, 나하고 웃고 싶어 할 거야. 그리고 그저 괜히 창문을 열 때가 있겠지... "

  어린 왕자는 별이 다시 머리 위로 돌아온 날 ‘노란 빛’에 쏘인다. 그는 바로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와서 처음 이야기를 나눈 뱀이었다. 사람들은 어디 있니, 사막에선 조금 외로운데,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로울 거야, 말했던 뱀. 그때 했던 대화처럼, 뱀은 어린 왕자를 제 별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어린 왕자는 조종사에게 오늘 밤엔 오지 말라고 종용하고, 조종사는 난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이에 어린 왕자는 자신이 좀 아픈 것 같이, 죽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하다가 대답하지 않는 조종사를 위로하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느 별에 내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모든 별이 아름답게 보일 거야. 어디서 내가 웃고 있는 줄을 모르니까, 어떤 별을 보아도 전부 웃는 것 같을 거야. 우물을 숨겨 놓은 사막과 비밀을 숨겨 놓았던 꽃과 여우와 어린 왕자가 아름다운 것처럼. 어쩌면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 어디서 네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온통 설레는 거리처럼, 언제 꽃이 피기 시작할지 알 수 없어서 매일 아침이 떨리는 봄의 초입처럼. 오늘만은 낙관을  스푼  얹어미래의 제일 멋진 점은 조금씩만 오는 거라던 어느 가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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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제일 좋은 점은
조금씩만 오는 거래
한번에 하루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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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중 하나인 이 책을 사랑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92년에 초판이 발행된 이 책의 뒷면에는 값 3,000원이 반듯하게 적혀 있다. 빛 바랜 종이와 활자는 타자기로 찍어낸 것처럼 유약하다. 오히려 그것이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 조금은 촌스러운 옛날식 프랑스어 번역투와, 자주 틀리는 맞춤법과 띄어쓰기,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렸다는 흑백 삽화까지도. 나는 이 책의 모든 어설픔을 사랑한다.

  아마도 나는 이 소설의 매 순간과 장면을 자주 떠올릴 것이다. 글쓴이의 말처럼, 고작 양이 꽃을 먹어치웠을지가 온 우주의 표정을 결정할 일도 있을 것이고, 어느 별일지 모를 오백 개의 방울들을 쳐다보면서 웃음소리를 듣는 일도 자꾸 생길 것이다. 나는 사막이나 밀밭에 가본 적도 그렇게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의 아이도 안아본 적도 없지만, 바로 내가 이 이야기와 관계를 맺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이 책은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고, 나는 이 책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나는 <어린 왕자>를 사랑하고, 그래서 길들여졌으니까.

le petit prince ㅡ
모든 어린 왕자와 모든 그의 연인에게, 바침


2018.05.
在人, 談.


사진 출처_책 <어린 왕자>
영상 출처_Naver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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