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촌에서 생활한다. 신촌에서 학교를 다니고, 신촌에서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리고 글을 쓰는, 나는 신촌의 자취생이다. 스스로의 일상을 균일하게 여과하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나는 ‘프로 신촌러’라는 칭호를 나름 달가워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가끔 이 젊은 도시는 지루하고 답답하다. 그럴 때면 취중진담은 거짓말이 되고, 가볍고 얄팍한 유흥은 천해진다. 술 취한 거리는 더이상 역동하거나 생동하지 않는다. 익숙한 거리는 낯설게 정지하고, 나의 도시는 생경하게 사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촌을 사랑한다. 만약 내게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신촌에서 살아가려는 사연을, 신촌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묻는다면, 내가 집 다음으로 자주 가는 ‘이곳’으로 답하겠다. 신촌이면서 신촌이 아닌, 그런 것들의 공간을 여러분께 기꺼이 소개한다.
아닌 것들의 공간
경의선 숲길은 옛 경의선 철길을 산책로로 탈바꿈시킨 공간이다. 이는 육 키로미터와 십만 제곱미터라는 총 길이와 넓이를 자랑하는 만큼 일곱 개에 달하는 구간에 걸쳐있지만, 나는 주로 서강대역에서 홍대입구역으로 이어진 와우교구간 혹은 홍대입구역에서 가좌역으로 이어진 연남동구간을 주로 걷곤 한다.
나는 이 두 구간을 중심으로, 경의선 숲길이 어떻게 나의 피로와 권태를 위무하는지, 어떻게 나로 하여금 생의 숨결을 감각케 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왜 이곳이 ‘아닌 것들의 공간’인지를.
비非인간의 공간
가장 먼저, 경의선은 비인간의 공간이다. 인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독점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뜻에서의 비인간. 아스팔트 대신 각종 풀과 꽃이 무성한 바닥에서부터, 그 위에서 자신의 발을 딛을 장소를 온전하게 보장받는 고양이와 강아지까지. 나는 바로 이 점에 반해 경의선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 #길냥이: 그들이 원하는 거리
한 친구에게 유럽 고양이는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우리나라 고양이가 사람을 피하는 건 학대의 경험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길에 사는 고양이는 온통 도둑고양이인 줄, 고양이는 애초부터 도망치도록 생겨먹은 동물인 줄, 어른들의 말처럼 고양이의 눈동자는 마녀의 것인 줄로만 알았던 때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몇 번 더 곱씹는 사이에, 나에게도 눈을 맞출 수 있는 고양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새 대학가를 중심으로 고양이를 보살피는 모임이, 도둑고양이에게 길고양이라는 이름을 찾아주는 운동이 생겨났다. 고양이와 그를 귀여워하는 일이 하나의 열풍이자 유행이 되고, 바야흐로 고양이와 집사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에 대한 논의는 우선 차치하도록 하자. 아마도 당신은 사랑스러운 고양이들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이곳을 무척이나 사랑하게 될 것이다. 고양이가 인간을 편안해하는 이곳의 풍경을 마주하면 나는 마음 깊이 안도하게 된다. 이곳의 고양이들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다른 고양이, 그리고 인간과 공생하고 있다.
이곳에서 고양이를 만난다면 처음엔 멀리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추천한다. 만지는 것도 좋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거리를 유지할 권리가, 관계를 수락하고 거절할 권리가 있음을 명심하자. 인간에게 귀엽기 때문에 살아남은 고양이들의 내일은 어디에 있을까, 라는 고민을 모두가 계속하며 앞으로도 그들이 원하는 거리가 가능하길 바란다.
둘, #댕댕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
나는 얼마 전에 첫 생일을 맞은 천방지축 우당탕탕 강아지와 살고 있다. 사실 강아지와의 매일 산책이 경의선과 가까워진 가장 큰 계기이기도 하다. 간단한 마실이나 단순한 걷기만으로는 강아지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활동량이 매우 많은 편인 우리 강아지에게는 이곳에서의 활동적인 산책이 절실했다.
이곳에서는 정말 많은 강아지를 만날 수 있다. 반려동물 돌봄 인구 천만 시대라는데, 그동안 어디 있나 싶던 신촌의 강아지들은 다 여기 있었군 싶을 정도로. 한 번 산책을 나가면 최소한 열댓 마리의 강아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우리 강아지는 이곳에서야 비로소 강아지 친구를 사귀는, 자신의 동족과 인사하고 놀이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그동안 분명히, 성실히 존재해왔는데도 신촌의 강아지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 무서운 일이다. 강아지라는 존재는 그동안 인간의 편의에 의해 우리의 시야에서 지워지고 가려진 것이다. 실제 장애인 인구에 비해 거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장애인처럼. 이는 곧 신촌이, 나아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강아지에게 배타적임을 시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강아지들이 강아지로서 자신을 재현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공간이다. 단순히 생을 부지함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누리고 친구를 만나며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는 비단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은 아닐 것이다. 더 많은 강아지들에게 더 많은 행복의 공간이 주어지고 내 강아지가 더 많이 행복하기를, 이곳이 그 첫발이 되기를 바란다.
비非차량의 공간
다음으로, 경의선은 비차량의 공간이다. 중간에 위치한 길목을 제외하면 차량이 아예 다니지 않는다. 차 없는 거리를 시행하는 연세로의 주말보다도 한적하고 깔끔하다. 이는 바로 차량이 아닌 것들의 이동에 대해서는 편의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페달을 밟는다거나, 발로 땅을 딛는 행위들에게는.
셋, #따릉이: 편안한 환경을 위하여
내게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시민들의 자전거 이용률이라고 답할 것 같다. 거리에서 자전거 이용자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 시민들은 남녀노소 자전거를 애용했다. 그 내막이 무엇일진 모르겠으나, 내게 그 모습이 여전히 퍽 평화로운 광경으로 남아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서울시 역시 앱만 설치하면 언제 어디서나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는 따릉이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편리하고 저렴한 이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자전거를 자유롭게 이용하기에는 아직 불편한 점들이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도로 상황이다. 애초에 자전거 도로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전거 이용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마저 미흡하다.
인도 옆 자전거 전용 도로에서는 보행자가 걸어다니기 일쑤고, 마지막 차선에 자전거 우선 도로 표시가 있어도 운전자들은 자전거를 배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버스나 택시가 정차하면, 자전거는 어떤 길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인도에서는 사람을 칠세라, 차도에서는 차에 치일세라, 자전거 도로에서도 자전거가 항상 긴장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자전거 역시 신촌에서 숨겨진 존재라면, 이곳은 다시 이들이 편안하고 안전해지는 장소가 된다. 여유롭게 주행하는 자전거들을 바라보면 나에게도 선선한 바람이 와닿는다. 나는 당신에게도 더 늦기 전에 따릉이를 타고 이곳에 가볼 것을 권한다. 잠시 쌀쌀해도 이내 상쾌하게 살갗을 두드리는 바람은, 생각보다 더 짜릿한 흥분일 것이다.
넷, #뚜벅이: 걷는다는 일의 의미
이곳은 나에게 걸음의 뜻을 되새기게도 했다. 매일같이 이곳저곳을 바삐 가는 사람이라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그 행위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냐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들에게 오히려, 지겹게 질리도록 걷느라 걸음에 대해서 잊고 살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다. 당신의 걸음이 그 자체로 존재했었던 적은 있었느냐고, 그것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고.
발터 벤야민은 도시의 산책자를 플라뇌르로 명명하며, 그를 도시 군중의 일부이면서 도시 일상이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양가적인 주체로 보았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를 생산 지향적인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것, 그렇기 때문에 수단이자 동시에 목표인 것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즉, 걷는 행위는 인문적 사유의 근원이 될 힘을 갖는다. 어쩌면 이 글처럼.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도, 이상의 날개도, 박태원의 구보도 도시를 걷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걷는 행위에서 그들만큼 자유로운 사유를 누리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 급박한 도시에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가기 바쁘고, 서두르고 재촉하며 바퀴 달린 것들에 올라탄다. 순수한 걷기는 오래된 의식처럼, 풍화된 구습처럼 생략되고 요약되었다.
그러므로 근원적이고도 본능적인 이 행위의 의미를 되찾고 싶다면, 의식적으로 산책로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오로지 걷기를 위해 내어진 공간에 오로지 걷기를 위해 시간을 내어보는 것은. 위대한 철학자는 못 되더라도, 그 경험은 잊고 살았던 감각들을 곱씹을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의 신촌 속에서, 걸음의 특권을 누리는 일은.
인간은 정작 세상에 온갖 해로운 일은 자신들로부터 이뤄진다는 점은 잊은 듯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해로운 것은 각종 이유를 붙여 배척해왔다. 금지하고 제한하거나, 교묘하게 따돌리며 존재 자체를 삭제하고 수정했다. 세상이 늘 그랬듯, 이기적이고 배타적으로.
신촌은 그러한 모습이 극대화되는 도시 공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끔 숨막힘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경의선 숲길은 그런 신촌과 나에게, 일종의 대안적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아니다’라는 것은, 다른 무엇‘이다’라는 뜻이니까.
이곳은 나에게 인간과 차량, 도시가 아닌 대신에 고양이와 강아지, 풀과 꽃, 자전거와 보행자, 바람, 달밤, 그리고 일상의 여유였다. 이곳이 당신에게도 그러하기를, 그리고 이곳을 닮은 공간이 세상 이곳저곳에 싹트기를 바라며, 다음 노랫말로 글을 맺는다.
난 세상의 조그만 부분들이 너무 잘 보여
이를테면 풀밭의 벌레들과
하늘 위 떠 있는 희미한 별들
강물에 반짝이는 잔물결
누군가도 우주의 먼지 같은 날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것 같기도 해
그게 뭐 어때서 그게 뭐 어때서
그게 뭐 어때서 그게 뭐 어때서
위수, 촌스러운 사람
사랑하는 반려견의 첫 돌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나와 너, 따위의, 세상의 모든 조그만 부분이 행복할 수 있기를 작게 기도합니다.
2018.10.
在人, 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