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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IN Nov 12. 2019

단풍이 든다는 것.

곁을 내어주는 것에 대하여


어릴 때 어디에선가 읽었던 ‘완벽한 흰색은 맨 처음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더럽혀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는 구절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아무 색이나 갖다 칠하고 부어버리면 결국 그 색을 지키지 못한다는 흔한 이야기.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람은 저마다의 색이나 향이 있고, 그걸 어떻게 유지하고 만들어나가느냐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앙드레김이 흰색을 유독 고집했던 이유가 어려운 살림에도 꼭 속옷만큼은 새하얗게 빨아 입혔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함인 것처럼, 누구에겐 빨강이, 검정이 또는 다른 무엇이 사랑인 것처럼, 앙드레김에겐 사랑이 어린 시절 가마솥에서 막 삶아져 나온 김이 나는 완벽한 흰색이 아니고 무엇일 수 있을까.


가을이 좋은 이유는 옷을 예쁘게 입기에 가장 적절한 계절이고 또 날씨가 맑은 날 여러 단풍과 파란 하늘의 조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가 조금 와서 그 색들이 돋보이게 되면 말할 것도 없고.
단풍의 과정은 여름 내내 우위를 점하던 엽록소가 날이 추워짐에 따라 점점 안토시아닌이나 카로틴 따위에 자리를 내주어 녹색을 잃게 되고, 겨울이 되어 영양분 공급이 더 줄어들게 되면 잎이 떨어지고 오직 타닌만이 남아 진한 갈색만이 남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찐득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내가 새로운 계절을 만나 가장 아름다운 색을 피우고, 결국에 그 관계도 떨어져 진한 갈색만이 남거나 혹은 다음 봄에 꽃을 피우거나.


사람이 간사한 게 내가 가진 것들이 전부인 줄 알다가 새로운 계절을 갑작스레 맞아버리면 ‘우물쭈물하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꼴이 되어버린다. 누군가의 카메라에 담기는 예쁜 단풍이 아니라 녹색과 노란색이 반쯤 뒤엉켜 있다가 갑작스러운 한파에 그냥 떨어져 버리는 그런 낙엽처럼.
새로운 계절에 온전히 곁을 내어줄 수 있게 그릇이 크고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날이 갈수록 생각은 영악해져만 간다. 엉성한 반반 말고 햇살과 계절을 가득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데 무엇 때문에 지금의 나는 이렇게 자조적일 수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태생이 염세적인 것처럼 날이 갈수록 생각과 중심을 지키는 게 어렵다.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조금 별로인 구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나만 별로고 다른 사람들 모두 꽃을 피우고 사는 것 같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존재만으로도 나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지, 나를 지탱하기 위해 내가 소비하고 있는 것들의 가치가 아직 유효한지 나는 모르겠다.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게 해주는 무엇인가를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 비가 온 뒤의 단풍을 닮은 옷이 만들고 싶다.
이 계절이 천천히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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