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기대감을 북돋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의 효시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절정에 오른 영화적 기교는 두말할 것 없었으며,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쌓아올린 사회에 대한 현실적 감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가장 놀라운 점은 사회의 가장 아픈 점을 건드리는 영화가 이토록 재밌다는 점이다. 실소를 자아내는 블랙코미디로 가득 찬 초반부를 지나 영화는 스멀스멀 스릴러로 전환되며, 잘 짜인 긴장감 속에서 송강호의 열연을 가이드 삼아 관객을 주제의식으로 초대한다. 확인사살에 가까운 몇 장면은 일말의 모호함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한 친절함마저 보여준다. 이번 글에서는 중요한 모티프인 계단과 냄새를 중심으로 영화 속 계층의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달리는 열차에서 추락하는 계단으로
기생충(2019)은 계층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설국열차(2013)와 닮았지만, 무대를 열차에서 아찔하게 하강하는 계단으로 옮겨 양극화 시대의 구조를 더욱 통렬하게 재현한다. 칸과 칸으로 연결되어 동일한 선로를 질주하는 열차는 생존이라는 목표 앞에 묶인 인류의 공동 운명체적 성격을 상징한다. 반대로 사회가 조장하는 상대적 박탈감의 크기만큼 긴 계단은 박사장(이선균 분)의 저택과 기택(송강호 분)의 반지하집을 철저히 분리한다. 두 계층 간 관계는 기생에 가깝다. 기택의 가족이 소파 밑에 숨고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모습은 바퀴벌레를 연상시킨다. 결국 그들은 영화 초반부 꼽등이가 쫓겨났던 것처럼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원래 있어야 할 반지하로 돌아간다.
수직적 공간인 계단에서 계층 간 이동의 가능성은 현격히 낮아진다. 설국열차에서 열차는 꼬리칸에도 동일한 위치 에너지를 부여하는 수평적이고도 동적인 공간이지만, 가파른 계단은 역전의 여지를 차단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파이를 키우는 박사장 같은 사람이며, 빈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근세(박명훈 분)처럼 머리를 찧으며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지하실과 반지하를 탈출하는 것은 '선을 넘는' 짓으로 언제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지하실을 탈출한 근세는 어린아이의 트라우마가 되며, 대낮의 참극을 일으키고 살해당한다. 저택으로 일탈을 꿈꿨던 기택의 가족 역시 영화의 모든 비극의 발단으로써 집행유예부터 죽음까지 각자의 처분을 받는다.
고착화된 계층 사회에서 신분상승은 기우(최우식 분)의 부치지 못한 편지에서만 가능한 꿈에 불과하며, 빈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빈자와 경쟁하여 생존하는 것이다. 전원 백수인 기택의 가족에게 전원 취업이라는 기회가 '재물을 가져다준다'는 수석과 같이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큼지막한 돌덩이에 산수경석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들어내면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했을 법한 원초적인 무기가 남는다. 기우는 영화에서 두 번 수석을 무기로서 인식하는데, 처음은 반지하 근처의 부랑자를 쫓아내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 번은 저택에 기생하는 다른 가족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즉, 빈자가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빈자들을 돌로 내려쳐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 하며, 수석은 이러한 구조를 강요하는 암담한 현실을 의미한다.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
기생충(2019)은 선량한 빈자와 탐욕스러운 부자라는 이분법적인 클리셰를 지양한다.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었지만 기택의 가족은 처음부터 거리낌 없이 와이파이를 훔쳐 쓰고 모함으로 알바 자리를 뺏으려는 사람들이다. 남을 기만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다. 반면 박사장의 가족은 번듯한 직장에 단란한 가정을 유지하는 모범적인 가족이다. 충숙(장혜진 분)의 말을 빌리면 '부자라서 착하다'. 실제로 영화 전반에 걸쳐 기택의 가족은 뻔뻔한 가해자이며 박사장 가족은 순진한 피해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장이 아닌 기택의 가족이 주인공인 이유는 기택 가족의 냄새가 대다수 우리와 같기 때문이다.
영화는 냄새의 원인을 고찰하고 의미를 확장하며 주제의식을 확립한다. 냄새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는 것은 부잣집 막내 다송(정현준 분)이다. 아이는 문자 그대로 운전기사와 가정부, 과외 교사의 냄새가 같다는 것을 알아내는데, 기택의 가족은 섬유유연제나 반지하 냄새 등 가족 수준의 문제에서 그 냄새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냄새는 박사장의 입을 통해 그 의미가 확장된다. 그는 기택은 선을 안 넘어도 냄새가 선을 넘는다고 말하며, 그 냄새가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설명한다. 냄새는 섬유유연제를 바꾼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속한 계층을 바꿔야만 제거할 수 있다. 소파 아래에서 우연히 대화를 엿들은 기택은 자신의 옷 냄새를 맡으며 계층 격차의 벽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폭우 속 침수하는 반지하는 냄새의 원인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캠핑이 취소되면 가든파티를 하는 박사장의 가족에게 냄새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다. 반면 기택의 가족은 결핍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역류하는 변기 물을 헤집어 건질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생존해야 하는 존재며, 냄새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더욱 심해진 기택의 냄새에 연교(조여정 분)도 코를 막게 되고, 아찔한 하강을 경험한 기택은 의도적으로 선을 넘는다. 이윽고 대낮의 참극이 발생하고 기택은 쓰러진 두 빈자와 코를 막는 박사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무언가를 결심한다. 그는 처음으로 '없는 사람들끼리' 휘둘렀던 칼을 돌려 박사장의 심장에 꽂아버리고 추방에 가까운 모습으로 지하실로 도망가게 된다.
한강과 괴물처럼 멀어진 두 계층
옥자 개봉 당시 한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한 화면에 담았을 때 쾌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괴물(2006)에서 실존하는 한강에 괴물을 풀어놨고, 옥자(2017)에서는 산골 소녀와 괴물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돌려 한국의 오늘을 바라본 감독은 저택에서 사는 가족과 반지하에 사는 가족을 한 화면에 담는다. 어쩌면 그의 눈에 비친 이 사회는 만날 일이 없어 냄새마저 달라진 두 계층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을까? 매번 영화의 결말부에 작은 희망이라도 제시했던 봉준호 감독이지만 이번에는 섣불리 해결법을 말하지 않는다. 허파가 축축해지는 씁쓸한 웃음을 안고 극장을 나서는 길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