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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토 Apr 16. 2023

홍상수식 3D 영화(6/10)

물 안에서(2023)를 보고

불분명하다. 요원하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을 당황시키고 끝내 사라지지 않는 아웃포커스는 영화화된 고도근시다. 관객이 보려 하는 것은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 있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영사기의 빛과 극장의 어두움이 만드는 것이라지만, 최근 홍상수의 세계에는 한 프레임 안에서도 볼 수 있는 세계와 볼 수 없는 세계가 나뉜 모양이다. 주연 배우가 동일한 인트로덕션(2021)에서는 광학 줌을 넘어 디지털 크롭의 영역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흐릿한 실루엣이 등장하였고, 작년 소설가의 영화(2022)에서는 분식집 유리창 너머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뒤 그 두 세계가 분리되고 때때로 소통하는 양상을 영상화했다.


물 안에서(2023)는 이러한 경향을 이어 아예 모든 장면을 아웃포커스하는 전위적인 실험소다. 영화는 홍상수 감독 본인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승모(신석호 분)의 역할의 입을 빌려 말을 하기도 한다. 남들이 하는 거 해서 뭐 하냐는 둥, 일단 그냥 해보자는 둥 하는 말이 그것이다. 불친절한 작품의 설명서이기도 하고 민망한 변명이기도 하다. 어쨌든 홍상수는 그렇게 했다. 모든 장면에 초점이 맞지 않는다. '영화는 카메라로 하는 예술'이라는 명제를 역설한다. 카메라의 존재감이 이렇게 큰 영화도 흔치 않다. 단순한 설정 값 변화 몇 개만으로도 카메라는 영화를 지배한다. 실존을 허락하고 본질을 규정한다. 의도적으로 뒤틀린 카메라의 압제 앞에서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은 카메라만이 아니다. 인물 간의 관계는 엉성하고 조금씩 엇나간다. 손뼉도 마주쳐야 하는 법인데 남은 피자 한 조각을 셋으로 나누는 일도, 마시던 술잔을 돌리는 일도 쉽지 않다. 때로는 날씨가 춥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이인 사람과 대화해야 하기도 하고, 그 정도 관계인 사람 둘이 잠시 보이지 않는다고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그렇다고 인물의 내면이 잘 보이냐 하면 그것마저 흐릿하다. 모두 각자 사연이 있어 보이는데 짐작하기가 어렵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행동뿐이지만 아웃포커스는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카메라에 대고 스마트폰으로 재생해 음질이 낮아진 김민희의 노래가 맴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서 쓸쓸히 부르던 노래와 다르게 가사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물 안에 있는 듯하다.


해상도가 낮은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뒤로 물러서야 하고 멀찍이서 봐야 보이는 것은 전체적인 구조다. 홍상수 영화답게 심상하게 흘러가던 장면들이 어느 순간 반복이 되는데, 그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다시 한번 카메라다. 처음 흰 옷을 입은 여자와 승모가 대화하는 장면은 영화 속 인물이 실제로 겪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동일한 장면에 카메라맨과 카메라가 동시에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카메라의 존재는 관객이 보고 있는 프레임을 찍고 있을 또 다른 카메라의 존재 역시 암시하며, 마치 3D 영화처럼 깊이의 방향으로 무한히 확장한다. 시야를 흐리는 아웃포커스는 이 거리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웃포커스 실험이 마냥 흥겹지만은 않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예술이지만 동시에 눈으로 보는 예술이다. 보는 내내 피로감이 쌓였고 강한 수준의 참여를 요구받았다. 영화는 과연 볼 수 없는 것을 담을 수 있을까? 홍상수의 실험이 흥미롭지만 이 영화는 미완의 성과를 남긴 채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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