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그녀와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 연말모임 겸 시상식이 끝나고 거리로 몰려나왔을 때 그녀는 내 앞에서 중견작가와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식사 후 호프집으로 들어섰을 때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녀가 그날의 주인공여서랄까. 나는 조금 흥분했고 많이 웃었다. 하긴, 오늘 같은 날이 삶에서 몇 번 있을까.
“스물 넷?”
“선생님은요?”
꼭 두 배가 많은 나이였다. 술잔이 오고 또 건너가고 난 급히 취해갔다. 많은 얘기를 나누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팔이 내 몸에 닿는 게 좋았다. 몸속 알코올 지수가 높아지면서 그녀의 등단작을 몇 번인가 떠올렸다. 작가란 조금 괴상한 동물이다. 언어로 빚어낸 자신의 분신과 진짜 자기는 얼굴, 성격, 행동 등등 너무나 다르다. 가령 십 년 넘게 한 작가의 책을 읽고 있었다면 상상 속에서나마 그와 어떤 형태의 사랑을 나눈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그렇게도 갈망했던 그를 현실에서 만났을 때, 거칠고 조악한 빗면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겠지만, 쉽게 그에게 실망해버린다.
사실 내가 그랬다. 또한 만남의 빗면이란 그것의 시간성 때문에 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엇갈려가는 항로를 틀어 빗면을 극대화해야만 그 마주침을 잠시 특별함으로 연장시킬 수 있다. 시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그녀와 그날 옆자리의 그녀는 너무 달랐다. 평면적으로 보였고 무엇엔가 쫓기는 것처럼 서둘렀다. 그런 시간의 앙금들이라면 나에게도 쉽게 찾아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는 다시 돌아와 앉았다. 창밖은 9월 밤이었다. 커다란 나뭇잎이 생을 들여다보듯 떨어지고 난 혼자 술을 따랐다.
“이름이 뭐랬더라? 벌써 취했나!”
“제 시 읽어보셨어요?”
“그럼. 템포가 빠르더라.”
“나쁘다는 거예요?”
“아니, 좋아!”
그녀가 등단한 날인데도 이름을 기억 못하다니! 직사각형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노파의 이빨처럼 빠져버렸다. 이제 노래방으로 옮겨갈 시간이었다. 이른 가을의 밤이 여름밤과 뒤섞이는 창밖은 달콤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자 그녀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뒤돌아보자 머뭇거리다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아니, 뭐라고 말을 했던 것 같다. ‘저도 오줌 마려워요!’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그냥 취한 척했지, 그다지 취한 건 아니었다. 화장실까지 기역자로 꺾어진 길이 징검다리 같았다. 비틀거리는 그 길은 어둡고도 붉었다.
그녀는 뒤따라오고 아니, 팔짱을 끼었던가. 화장실은 좁았다. 그녀는 내 뒤로 바짝 들어와서는 순식간에 문을 잠그고 키스를 했다. 이 자리는 어쩌면 그녀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니까. 살면서 이런 날이 몇 번…. 난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입술은 성급하고 뜨겁고 떨고 있었다. 목을 더듬고 다시 귀밑을 훑었다. 스물 넷, 그때서야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순간 많은 것을 물었지만 많은 것을 덮어버릴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더 깊이 내게 몸을 기댔다.
담배를 피우러 옆 테이블로 다시 옮겼을 때 결정해야 했다.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든지, 그냥 이 지점에서 헤어지든지. 이런 저런 계산보다 더 빠른 직감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다. 서른 살이었다면, 마흔 살이었다면 그녀와 시작할 수 있었을까? 뭉텅한 시간이었다. 넌 머리통만 너무 커. 물렁한 네가 싫어. 아직 나조차도 찾지 못했다니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여자라는 것도! 그러나 내게 시작된 증상이 병은 아닌 것 같고, 또 다른 실험에 몰두했다고 할까. 내가 사는 집이 너무 커져버렸거나 너무 작아져버렸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날의 빗면을 더 넓히기 위해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난 그녀의 갑판에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