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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분홍 Jan 13. 2019

두 번째 크루즈는 동부 지중해

슬슬 여유 생기나요

첫 번째 크루즈 여행은 눈떠보니 한국이었다. 정말 하루종일 바빴다는 느낌이 진하게 남았다.되돌아봐도 하루 종일 바빴던 기억만 있을 뿐. 여행을 마친뒤에는 포토북을 만들어 종종 들춰보았다. 한동안 세 모녀의 공통 화제는 크루즈 여행이었다. 몇 달이 지나니 공통적인 생각을 품게 된다. 


“다시 가면 진짜 더 잘 놀텐데”






서부 지중해를 다녀왔으니 좌우대칭을 맞추기 위해 노선은 자연스럽게 동부 지중해로 모아졌다. 시칠리와 아테네, 에페소라니. 기항지도 너무 멋지잖아! 


지중해 크루즈는 날씨 관계로 5월부터 9월까지만 운행한다. 유럽의 7, 8월은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적당히 더운 5월에 좋겠다며 의기투합했다. 사실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던 것인데. 첫번째 여행과 마찬가지로 크루즈와 항공권 예약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로마 치비타베키아 기차역이었다. 역에는 여전히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우리가 드디어 항구까지 택시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크루즈쉽은 지난번과 동일한 네비게이터 호였다. 14층 높이로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든든했다. 이번에도 잘 지켜줄 것만 같았다. 첫번째와 달리 동부 지중해 여행 승선은 조금 서둘렀다. 지난번에 오후 2시에 승선하라는 안내대로 했다가 오후 일정이 너무 바빴더랬다.


승선 후 일정은 바로 뷔페식당! 여유롭게 점심을 먹은 뒤 저녁테이블을 확인하기 위해 정찬식당으로 내려갔다. 지난 크루즈에서는 10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서 각국에서 온 손님들과 저녁을 먹었다. 정말 조용히 식사만 하던 젊은 부부와 어린 아들, 적당히 분위기 맞추는 중년부부, 활발한 할머니 두 명이 우리 테이블의 멤버였다. 서양인들은 다 활발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나의 편견이었다. 약간 어색해 보이던 중년부부는 이틀 후 부터는 저녁 시간에 보이질 않았다.

 

정찬 식당에는 이미 우리와 같은 요청을 하려는 몇몇이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렸을까, 다행히 독립된 테이블을 배정받았다. 얏호!


드레스코드는 매일 선상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멀 데이(Formal day) 에는 남자들은 정장 차림에 여자들은 드레스를 입는다. 보통 승선 두번째 날에 웰컴 파티와 함께 진행된다. 지난 크루즈에서 TV에 나올 법한 멋진 사람들을 잔뜩 만났기에 나도 질세라 옷과 구두를 한가득 챙겨온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편하게 입어도 되는 캐주얼 데이에도 항상 차려입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스스로가 귀엽기도 하다.


식사를 하고 5층 Promenade 거리로 가니 세상 멋쟁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백발의 신사 옆에는 매만진 머리에 드레스 차림의 할머니가 함께 있었다. 어린 아이들의 활기찬 에어지와 함께 노년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 크루즈 였다. 


샴페인이 무제한 제공되는 점도 웰컴 파티의 매력이다.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재즈 연주를 들으며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크루즈 디렉터가 등장한다. 엄청난 발성으로 환영인사를 한 뒤, 선장을 소개하면 그야말로 축제다. 선장 이후에 각 파트별 오피서들이 등장하고 한 명씩  맡은 파트를 소개한다.


분위기를 띄우는데 국가별 인원 발표하는 게 최고다. 크루즈 디렉터가 “미국, 500명!!” 하면 미국 승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이번 크루즈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 순으로 승객수가 많았다. 승객수가 적으면 아예 발표를 안 하는데, 이번에는 한국 사람이 무려 17명! 


“South Korea 17”


우리는 열렬히 환호했고 중간중간 소리가 들렸던 곳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기항지 일정 중 제일 기대했던 곳은 아테네였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꿈꾸었던 도시였다. 그 당시에는 반마다 학생신문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1면에 크게 광고가 실렸다.


- 주제: 민주주의에 대해 논하시오

- 상품: 1등 아테네 견학(항공권, 숙식 일체 제공)


주최가 어디였는지 2등 상품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난 며칠에 걸쳐 글을 쓴 뒤, 당시 사회과목 선생님을 찾아가 아테네에 꼭 가고 싶은데 글을 봐주실 수 있겠는지 부탁드리기도 했다. 결국 난 응모했지만 아테네에는 가지 못했다. 탈락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수상작으로 실린 글을 보고 납득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인지 조사해서 말 그대로 논했던 나와는 달리, 일등의 글에는 동네 반상회를 따라갔다가 어른들이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내가 주는 상은 아니었지만 과연 받을만했다.


그때 이후로 내 소망은 어른이 되어 아테네에 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본 아크로폴리스는 상상보다 더 웅장하고 각 신전은 정교했다. 중1인 나와 함께 걷는 기분이었다. 끊임없이 살아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근사한 일임애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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