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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토끼 Dec 30. 2021

십이월 이십육일의 기록

마음의 웅덩이



십이월 이십육일.

전날,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에는 친구 집에서 소소한 파티를 했달까. 유명한 수제 케이크 가게에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주문했다. 친구가 꾸며놓은 키 작은 트리와 전구들 아래서 케이크를 들고 사진도 찍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감성을 노렸지만, 코미디에 가까웠다는 것.



화장기 없는 얼굴, 잠옷 바지, 머리 위에 올려둔 조막만 한 고깔모자. 거기다 케이크를 포장한 빨간 리본을 잘라 셋이서 나눠 고깔 옆에 매달았다. 연거푸 “이건 미친 X 아니야?”  “이게 맞아?” 하면서도 풀지 않았다.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고 놀려대기 바빴다. 그래도 덕택에 나를 짓눌러오던 돌덩이들을 모른 체할 수 있었다.



매운 떡볶이와 달달한 치킨, 차가운 맥주, 치즈 소스를 듬뿍 찍은 나쵸, 엉망으로 자른 케이크를 가득 먹었다. 드라마 <고요의 바다> 전편을 보고, 뜨뜻하게 덥혀진 이불속에서 영화 <엔칸토>를 보며 꾸벅 졸았다. 소확행.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었다.



다음 날인 이십육일. 캄캄해질 때까지 머물다가 친구 집에서 나왔다. 자동차마다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펑펑. 평소 작은 추위에도 몸을 한껏 움츠리는데, 눈이 오는데도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같이 집으로 걸어가던 친구에게도 말했다. “이상하게 딱히 안 춥네?”



니트 버킷햇을 푹 눌러써서일까. 올겨울에 새로 산 패딩 때문인 건가. 넉넉한 바지 사이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밑단이 푹 젖었는데도 안 춥다니.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이게 참 말이 안 되게 예쁜 거라. 바람 때문에 사선으로 내리는 눈발. 가로등의 주황빛 조명과의 어우러짐.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골목길. 촉촉한 아스팔트. 분위기 탓인지, 가물거리는 내 마음 때문이었는지. 별 것 아닌 풍경이 내면에 폭삭 들어앉았다. 춥지 않았던 이유도 편안하게 데워진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랑 헤어지고 집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는 데 뒤꿈치가 어쩐지 묵직했다. 달팽이처럼 흐느적흐느적 느릿하게 움직였다. 현관문 앞에 다다라서는 도어록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겨우 집에 들어가니 물먹은 솜을 뒤집어쓴 듯 온몸이 무거웠다. 애써 밝은 척해보는데 아빠의 얼굴 위로 어둑한 그늘이 져 있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 엄마가 저혈압으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얼마 전 수술이 잘 끝났다 해서 한시름 놓고 있었는데. 걱정보다도 지친 마음이 먼저 울컥 솟은 건 내가 이기적이여서겠지. 죄책감에 세수를 하다 말고 세면대를 붙들어 조용하게 울었다. 내 안의 웅덩이는 언제 마를까. 마르는 날이 오기는 할지. 막막하고 괴괴한 기분. 이 와중에 자기 연민이라니. 헛웃음도 지었다. 누가 봤다면 정말 미친 X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십이월 이십육일은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이십구일, 다행히 엄마의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다. 웅덩이가 한결 작아졌다. 따스해야 할 연말, 예기치 못하게 암 환자가 되어버려 얼음장 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던 우리 엄마.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만, 엄마가 퇴원한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더는 아프지 말고, 춥지 않기를. 모두의 겨울에 봄이 당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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