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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현 Apr 26. 2018

평양냉면 좀 먹어봤다고 으스대고 싶다면?

음식여담(飮食餘談) 4 - 냉면당의 참견


"모든 자유를 잃고, 음식 선택의 자유까지 잃었을 경우, 항상 애끊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다." 소설가 김남천에게 냉면은 이랬다. 시인 박목월은 "단맛의 용해적 황홀감은 노란빛과 통할 것 같고, 신맛의 서늘한 신선미는 청색과 통할 것 같다."라고 냉면의 맛을 표현했다. 평안남도 출신 소설가에게 냉면은 향수 같은 근원적인 맛이었고, 경상북도에서 태어난 청록파 시인에게는 노랗게 들어와 파랗게 넘어가는 감각적인 맛이었던 셈이다.


남과 북의 작가가 서로 다른 표현으로 얘기하는 냉면의 맛은 평양냉면이라고 하면 으레 따라붙는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고고한 법도와 맞닿아 있다. 술기운을 짜르르 깨우는 신선함, 숙취 없이 기분 좋은 취기만 남았을 때 찾아오는 황홀감이 냉면으로 해장하기 위해 부러 술잔을 기울이는 냉면옥의 풍경을 만들었고, 그것은 때론 향수처럼 엄습해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평양에선 명물로 꼽히는 술 감홍로를 마시고 취하면 냉면으로 속을 풀며 '선주후면'의 미풍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양 옥류관 냉면이 아닌 다음에야 서울에서 그 전통을 좇기 위해선 냉면의 격전지로 불리는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를 찾는 게 방법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냉면집들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老鋪)인 데다가 점심시간이면 더위도 시름도 잊고 싶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는 '핫플레이스'이기도 하다. 냉면집들 앞에 길게 줄을 선 광경은 그 맛 모르면 이해가 안 돼 고개 절레절레 흔들지만, 아는 사람은 입맛 다시며 고개 주억거리게 하는 진풍경이다.


"차가운 냉면으로 해장을 하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를 겨우 이끌고  평양냉면 집에 당도했더라도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냉면 한 그릇 받아 들기 무섭게 "이게 무슨 맛이냐"는 타박이 대번에 날아든다. 이효석이 '유경 식보'에 "육수 그릇을 대하면 그 멀겋고 멋없는 꼴에 처음에는 구역질이 납니다."라고 썼을 정도다. 그 맛은 밍밍하다. 육수와 동치미로 맛을 낸다. 이 맛이 대체 뭐냐며 설명해달라는 이에게는 '선주후면'만큼이나 그럴듯한 '대미필담(大味必淡)'이란 답을 들려줘야 한다. 정말 좋은 맛이란 반드시 담백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그런데 이 담백함은 햇볕 내리쬐는 여름보다는 눈 소복이 쌓이는 겨울의 풍경과 닮았다. 본디 냉면이 겨울 음식인 까닭이다. 냉면에 필요한 동치미 국물이나 얼음만 봐도 겨울에 먹기 시작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도 겨울에 냉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시월 들어 서관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문에 이중으로 휘장을 치고 폭신한 담요를 바닥에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쟁개비에 노루고기 저며 굽고 길게 뽑은 냉면에 배추절임 곁들이네"라고 읊조렸다.

  

추운 겨울에 즐기는 밍밍한 맛은 평양냉면이 '마니아'의 음식으로 여겨지게 했다. 냉면 마니아는 요즘 불쑥 튀어나온 미식의 잣대가 아니다. 80년 전인 일제 강점기에도 있었다. 1938년 12월 평양의 냉면 산업 종사자들의 파업을 다룬 기사를 보면 이로 인해 '냉면당'이 골머리를 앓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

  

면 타래 좀 풀어봤다고 으스대는 냉면당들의 자기주장은 좀 남다르다. 육수나 양념을 어떻게 만드는지, 면의 비율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고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 등을 따져 먹는다. 가위의 사용 및 식초와 겨자의 첨가 등 먹는 방식에 있어서도 주장이 뚜렷하다. 섣불리 먹으면 '초딩입맛' 취급받기 십상이지만 제대로 꿰고 있으면 곧바로 '제법 고수군'하며 흡족해한다. 애정이 남다르다 보니 냉면당들은 참견도 보통이 아니다. "맛을 들이기 어렵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도 쉽지 않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냉면을 가위로 자르다니"하며 달뜬 눈으로 쳐다본다.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You are what you eat)"이라고 했다. 그가 냉면을 두고 한 말일 리 없지만 먹는 음식이 그가 누구인지를 설명한다는 주장은 냉면당들의 폐부를 찌른다. 이렇게 먹어야 제맛이라고 간섭하는 것은 냉면을 넘어 어쩌면 인생에 대한 참견 아니었을까. 한 선배는 평양냉면의 성지로 불리는 집에 가서 한사코 비빔냉면을 주문한다. 그러면서도 잊을만하면 '우리 평양냉면이나 먹으러 갈까'하며 넌지시 말을 건넨다. 선배가 먹는 것은 평양냉면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지만 어쩔 수 있나. 그렇게 먹는 게 바로 그 사람인데. 선주후면의 원칙만 '통일'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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