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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ng Juha Jun 02. 2022

우연은 없다.

삶에서 만난 다양한 필연에 대해

'우연은 없다'라고 제목을 붙이고 '삶에서 만난 다양한 필연에 대해'라고 부제를 쓰니, 너무 커다랗고도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쓰려했었나 싶다. 그게 아닌데. 삶에서 만난 다양한 필연에 대해 언젠가는 써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쓰지 못하겠는데 왜 제목을 저렇게 붙였는지. 어쨌든 이 글의 제목과 관련해 커다란 이야기가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몇 달 전, 그니깐 3월 즈음에 나는 일정 기간 동안 '444'라든지, '666' 같은 숫자를 마주치는 일이 지나치게 잦았고, 이에 네이버 검색창에 이 숫자들의 의미를 곧잘 검색해보곤 했다. 원래 이런 숫자들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너무 자주 보게 되니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착각이든 무엇이든 한창 '666'이라는 숫자를 일상에서 자주 마주칠 때 찾아봤던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지금 자신의 생각의 균형이 깨져있습니다. 

물질에 너무 집중하고 있어요. 


이 숫자는 

지구와 영계 사이의 

생각의 균형을 잡으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어쩌면 아무런 근거도 없을지 모르는 엔젤넘버 666의 의미를 보고 나는 '그래, 나는 지금 물질에 너무 집중하고 있지'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사실 부업이나 코인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데 온통 마음이 쏠려있었기에, 정말이지 666이라는 숫자를 마주칠 때마다 자못 놀라며 '그래, 물질과 영성 사이의 균형을 잃지 말자'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퇴사를 일주일 정도 남겨둔 시점에 이런 꿈을 꾸었다. 꿈은 마치 1부와 2부로 나뉘는 것만 같았고 그 꿈은 악몽으로 구성된 1부가 끝난 뒤 시작되었다. 나는 어떤 한 남자의 집인지 작업실인지 모르는 곳에 가게 되었는데, 그 남자에게 장난을 치려는 마음에 현관에 있던 그의 신발을 신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분명 남자 신발이었는데 내 발에 꼭 맞았고 그 꿈을 꾸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 왠지 그에게 신발을 돌려줘야 할 것만 같아서 다시 돌아가다 깨어났는데, 그날 오전 내내 꿈에서 느낀 좋은 기분에 잠겨 1부에서 꾼 악몽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늘 습관처럼 그래 왔듯이, 이렇게 처음 꿔본 묘한 기분의 꿈에서 깨고 나면 꼭 네이버에서 꿈 해몽을 찾아보곤 한다. 자신에게 꼭 맞는 타인의 신발을 신는 꿈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에게 잘 맞는 이성을 만나게 된다는 풀이와 다른 의미로는 이직을 하게 된다는 풀이가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 퇴사를 앞두고 있었고 꿈을 꾸고난 뒤의 여운과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이직을 하게 되려나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지원했던 회사에는 떨어졌다. 그렇다면 나와 잘 맞는 이성을 만나게 되는 걸까? 그렇게 또 하나의 우연을 필연으로 생각해 버렸다.


 




나는 사실 크리스천이므로 이런 식의 미신과 우연에 가까워 보이는 것들을 어떤 신호와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지만, 여태껏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살아본 결과 분명히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있고 그 세계가 나에게 미리 일어날 일, 혹은 일어난 일에 대해 힌트를 주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스무 살 때, 대학 합격 발표가 나기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 꿈으로 알려주셨던 적도 있고, 만학도로 예대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볼 때, 정말이지 시험 준비를 하나도 안 했는데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나 내용이 다 기출 주제 또는 면접 질문으로 나와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어떤 시인의 시를 자주 가는 혜화의 단골 가게에 필사해 붙여놓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해 추석 연휴, 그 시인이 친구들과 그 가게에 찾아왔던 날, 그의 시가 붙어있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던 나와 그들이 합석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송편을 빚게 되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은 일도 있었다. 또 그 이듬해 즈음이었을까. 어느 작은 문학서점에서 5월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설을 돌아가며 낭독하고 있을 때, 그 소설을 쓴 아주 유명한 작가가 불쑥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왔고 결국 그의 목소리로도 해당 소설을 듣게 되는, 봄날의 꿈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 모든 게 우연인가. 이뿐만인가. 


모년 모월에는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떤 작가가 무려 다섯 번인가 꿈에 나왔고, 나는 꿈에서 그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문학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는데, 더 이상 그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실제로 그를 강남에 있는 모 치킨집에서 마주쳐, 무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에 대한 꿈을 꾸기 전에 나는 '이제 문학, 더 이상 안 좋아할 거야' 하는 상태였고 '소설도 그만 쓸 거야'하는 상황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가 꿈에 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나는 문학에 다시 흥미를 갖게 된 적이 있다.


이것도 그저 우연이라 할 수 있는가. 우연치고는 좀 심하지 않은가.





크리스천은 원래 '섭리'라는 걸 믿는 족속이다. '섭리'는 '필연'과 통하는 개념이고. 어쨌든 내 삶에는 도무지 우연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일들의 무척 많이 일어났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가끔은 마음이 복잡한 동시에 흥미롭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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