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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Dec 28. 2023

꼰대 생각 39: 봄을 기다리며

12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의 끝에, 겨울의 중간쯤에 서서 부질없이 봄을 기다린다. 

늘 그렇듯 기다리는 건 빨리 오지 않는다. 

애를 태우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건 항상 늦게, 그것도 아주 늦게라야 온다. 

기다리는 봄이야 늦게 오겠지만, 잡아두고 싶은 세월은 빨리 오게 마련이다. 

봄을 간절히 기다리면 봄은 늦게라야 올 테니 빨리 오는 세월을 좀 늦출 수 있으려나. 

아직 저 멀리 있는 봄을 생각하자니 문득 옛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교사 초임 시절에 큰 사고를 칠 뻔한 적이 있다. 

언 땅이 조금씩 녹고, 찬바람이 아직은 남아 있지만 가끔 여름인가 싶을 정도의 햇살도 뿌려주던 시기가 되면 

콧구멍에 바람이 든다. 

어른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다. 

그래서 학교는 봄 소풍을 간다. 


농촌지역이라 소풍 장소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반시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거리다. 

외지에서 온 교사들에게는 낯선 곳이지만 아이들은 자기 동네니까 익숙한 곳이라 심드렁할 것도 같은데 며칠 전부터 들뜬 모습이다. 

매년 두 차례 가는 소풍이 거기서 거기겠지만 책이 아닌 도시락과 간식이 들어 있는 가방이 있으니, 장소는 별 상관이 없다. 

마음이 들뜬 이가 아이들뿐이겠는가. 

교사도 학부모도 봄바람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 놓는다. 


농촌에서는 학교행사가 곧 학부모 행사요 마을 잔치하는 날이다. 

봄소풍과 가을소풍날,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에 하는 소(小)운동회, 학교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이름 붙여진 가을대(大)운동회가 그렇다.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마을이 학구를 이루는데, 마을이 돌아가면서 행사를 맡는다. 

선생님과 마을 어르신들 대접할 음식 준비도 하고, 학교 일도 나서서 도와주곤 한다. 


신나는 소풍날, 잘 다녀오라는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 끝나면 출발이다. 

학교에 모여서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면 곧 경운기 한 대가 털털거리며 우리를 따라온다. 

경운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여럿 보인다. 

봄 소풍 행사를 맡은 마을 학부모들이다. 

그 경운기 뒷자리에는 김밥도 있고, 잡채도 있고, 보쌈 고기도 있고, 소주와 막걸리도 있다. 

요즘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광경이다. 


준비해 간 게임을 아이들과 할 틈도 없이, 학부모의 성화에 배만 불러온다.

봄 햇살은 마냥 따스하기만 하고, 아이들은 게임 같은 거 하나도 하지 않아도 즐겁기만 하다.

붙잡고 싶은 시간은 언제나 빨리 가기 마련이다. 


벌써 정리를 할 시각, 깨끗하게 치우고 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가져온 것뿐만 아니라 원래 있던 쓰레기도 모두 모았다. 

지금은 불법인 일이지만 30년 전, 그때는 그랬다. 

모아 놓은 쓰레기에 불을 붙였다. 

나름 깔끔하게 치워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불이 잘 붙으라고 큰 나뭇가지로 살살 휘저었더니 바람에 불씨가 날리더니, 언덕 위쪽으로 마른풀과 나무에 금방 불이 옮겨붙었다. 


달려가서 불을 꺼려고 두드리면 불이 두 개로 늘고, 옆으로 자꾸 번져나갔다. 

아뿔싸, 큰일 났구나! 하는 순간, 같이 있던 학부모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불을 껐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산을 홀라당 다 태워 먹고 내 얼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뻔했다. 


다음 날, 교장샘 왈,

“나야 이미 늙어서, 잘리면 손자라도 보면 되지만, 결혼도 안 한 자네는 어쩔뻔 했노? 허허허”


아직 볼 손자는 없지만, 그때 그 말씀을 하시던 교장샘 나이가 되었다. 

학교를 그만 두었으니 다시는 아이들과 함께 봄소풍을 갈 일은 없겠지만, 봄이 오면 김밥 한 줄 싸 들고 봄소풍을 가야겠다. 


그래도 봄은, 애타게 기다리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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