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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Oct 16. 2023

제37화 숲과 인간의 숨, 생명의 환희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아르수아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 1차 순례: 2022.7.25~8.14, 493km, Saint-Jean~Léon

 - 2차 순례: 2023.10.3.~10.25, 329.5km, Léon~Santiago de Compostela)

#걷기 11일 차(31일 차)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아르수아(Arzua)

#29.74km / 8시간 28분

- 누적 : km / 799km

#숙소 :  Los Tres Abetos Hostel  8인실 16유로

- 아르수아 입구에 위치. 시설이 깨끗하고 수건도 주고 주인이 친절함


숲과 인간의 숨

10월 15일, 오늘은 일요일이다. 06:50, 12도.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아침 공기가 더 선선하다. 마을 중심가에서 안내 표지판을 따라 내려오면 길가에 카페가 몇 군데 영업 중이다. 여기서 아침 식사를 해도 좋고 아니면 4km 정도 가면 산 술리안 마을에 카페가 있다.

마을을 벗어나는 데는 1km 정도인데, 도로 옆에 난 길을 따라 나오다 오른쪽 마을길로 접어든다. 오늘도 비가 예보되어 있어 별들도 구름에 가려 어둠을 더 어둡게 한다. 길은 짙은 어둠 속에서 플래시 불빛 아래 조금씩 제 살을 드러낼 뿐이다. 혼자라면,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길이라면 이 시간에 이 길을 걸을까 생각해 본다. 먼저 길을 나선 이의 희미한 빛의 흔들림과 뒤에 따라오는 이의 기척이 이 깊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한다.


숲은 말이 없다. 비에 젖은 숲은 더 고요하기만 하다.  숲의 생명들도 비에 잔뜩 움츠려 여명을 기다리고 있다. 말없는 숲이 토해내는 깊은 숨은 숲 속으로 난 길을 걷는 순레자들의 숨까지 다가와 폐까지 산소를 밀어 넣는다. 인간의 몸을 한 바퀴 돌아나간 가쁜 숨을 숲은 다시 그 품속으로 깊이 빨아들인다. 인간과 숲이 생명을 교환하는 것이다. 숲 속을 거닐며 생명의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산 술리안의 후손

4km를 걸어오면 산 술리안 (San Xullian) 도 카미노 마을에 작은 카페가 있다. 젊은이 혼자 카페를 운영하는데 다른 카페와는 다르게 커피나 빵을 주문하면 직접 자리까지 가져다준다. 표정이나 말을 그렇지 않은데 친절을 행동으로 보인다. 혹시 산 술리안의 후손일까?


카페 바로 옆에 산 술리안 성당(Cruceero de San Xiao)이 있다. 산 술리안(또은 시아오)은 선원, 여관주인, 서커스 단원들의 수호성인인데 그에 대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술리안은 사슴을 쫓다가 부모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이 예언이 두려워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술리안의 부모가 그가 사는 곳을 찾아왔는데, 술리안의 아내는 술리안의 부모에게 잠자리를 내어주고 쉬게 한다. 하필이면 그날 집에 돌아온 술리안은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을 하는 줄 알고 그 둘을 살해한다. 이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선행을 베풀어 수호성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닮았다. 자신의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피하려고 했으나, 결국에 신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마는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 두 이야기는 인간에게 지워진 비극적 운명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 운명만이 끝이 아님도 말해준다. 인간은 주어진 숙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도 그 뒤의 삶은 결국 인간 자신 몫이다.


맥주 한 잔과 뽈뽀 한 접시

산 술리안을 지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8.8km까지 여전히 숲길이다. 잠시 도로 옆으로 나왔다가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숲으로 내리는 비 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오늘 내리는 비는 거센 바람에 휩쓸려 오는 비가 아니라 가을 속에 가만히 내리는 비다. 판초우의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도 듣기 좋다. 레보레이로(O Leboreiro)을 지나고 멜리데(Melide)까지 쉬지 않고 걷는다.


저 멀리 멜리데 마을이 보인다. 마을 초입에 작은 돌다리가 있고, 다리 너머 마을의 정경이 이쁘다. 옅은 붉은색 기와지붕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다리를 건너가도 카페가 보이지 않는다. 산 술리안에서 11km를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 아직 쉴만한 카페가 없다.


1km 정도 안으로 들어오자 길 끝에 뽈뽀(문어숙회)로 손님을 끄는 아주 큰 레스토랑(Pulperia  A Garnacha, Melide)이 있다. 맛보기를 먹어보니 부드럽고 맛있다. 접시 크기가 세 종류인데 제일 작은 접시는 11유로. 두 사람이 먹기에 적당하다. 맥주 한 잔과 뽈뽀 한 접시면 비 오는 날 성찬이다. 게다가 바게트 빵이 그동안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다.


로버트, 요셉 그리고 멕시코 아줌마

같이 걷던 사람들이 멜리데에서 많이 사라졌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 카페에서 쉬는 사람, 쉬지 않고 먼저 간 사람 등 한동안 같이 걷던 사람들의 속도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시내를 빠져나와 숲길을 걷는데, 외국인이 말을 걸어온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온 미국인 로버트란다. ‘언통’이라는 말을 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지역이름인지 음식이름인지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은 그 말이 ‘안녕’이어서 같이 크게 웃는다. 석 달 전에 은퇴한 67세의 솔로. 몇 달 전에 명퇴한 나를 축하해 준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에게는 은퇴 파티(Retire Party)란다. 멋지다.


브라질에서 온 요셉은 매일 개구리 군복을 입고 다녀서 눈에 띈다. 레온부터 같이 걸었는데 오늘 통성명을 한다. 영어를 몰라 ‘브라질 커피 산토스’까지만 얘기를 나눈다. 혼자 빗속을 힘겹게 걷는 또래 아줌마에게고 말을 걸어 본다. 멕시코에서 왔다는 그녀에게 왜 혼자냐고 물었더니 친구랑 둘이 오기로 계획했는데, 나중에 못 가겠다고 해서 혼자 왔단다. 한국인들을 알베르게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다들 요리를 잘해서 인상 깊다고 한다. 요리를 한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어보질 못했다.

저 멀리 리바디소(Ribadiso 26.3km)가 보인다. 걸어보니 생각보다 멀다. 마을에 아담한 알베르게가 여럿 있다. 마을에서 목적지 아르수아(Arzua 29.2km)까지는 막마지 힘든 오르막이다. 참, 오늘은 일요일, 휴일 날 문을 연 주유소 슈퍼마켓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이제 이틀 남았다.



#산티아고_길_위에_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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