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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rishin Jun 01. 2022

그림책은 어떤 꿈을 꾸는가 1.

도착 (The Arrival)  / 그림: 숀 탠 (Shaun Tan)


제주에 내려간 지 4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여전히 제주는 낯설고 그곳의 문화에 스며들지 못한 채 어떤 막을 사이에 두고 부유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을 부정하지 않고 스스로 장기 체류 중이라 여기며 여행자처럼 매일을 살고 있습니다. 낯설고 불편한 것들이 여행자의 시선에서는 낭만적으로 비치지기에 나쁜지 않은 처세술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새로운 장소에 대한 낯섦과 이질감에 대해 너무나도 놀라운 묘사를 하고 있는 그림책을 발견하고 마음이 동하여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어 보는 것 같은 느낌의 브라운 톤의 연필 소묘, 낡은 종이 질감을 그대로 옮겨 놓은 페이지, 섬세하게 관찰된 장면의 묘사들로 채워진 그림책 <도착>은 글 없이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글이 없지만 마치 영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인물들의 행동, 표현이 연필 소묘 만으로도 충분히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숀 탠 만의 특별한 상상력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새로운 도시의 모습은 SF 장르의 시각예술 장인으로서의 명성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게 합니다.


저는 여기에 주인공의 목소리를 상상하여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책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주인공의 생각은 저의 추측으로 이루어진 글이지만요. 저의 해석이 <도착>을 이해하는 데에 재미를 더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1 -


 떠나는 날, 내 눈에 들어왔던 풍경은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았다. 낡은 탁상시계, 늘 먹던 수프와 금이 간 찻잔에 담긴 따뜻한 차 한 잔. 그리고 단단했던 가족의 모습. 이런 풍경을 가방에 담아 나는 고향을 떠났다.

내가 살던 고향은 무색무취의 생기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언제 마을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검은 괴물이 마을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나는 딸에게 마지막으로 종이 새를 접어 주고 새로운 시작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The Old Country, 2004, graphite pencil digitally coloured, 60 x 40cm

 

- 2 -


 내가 탄 거대한 배에는 나처럼 새 희망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나고 그만큼 하늘의 모습이 여러 번 바뀌었다. 배에 탄 사람들의 두려움과 초조한 표정들 속에서 나는 가족에게 편지를 쓰며 마음을 달래었다. 그때 처음 보는 하얀 새무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날아가 나는 놀란 눈으로 그 무리를 좇았다. 시선이 끝나는 곳에 처음 보는 거대한 건물들이 서로 악수를 하며 서 있는 항구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배에서 사람들의 무리가 우르르 쏟아져 내려와 한 곳에 모였다.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검사를 받았고, 여러 종류로 분류되었다. 나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보아도 그들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내가 받은 건 알아볼 수 없는 종이 한 장뿐이었다. 

 그 종이를 들고 나는 어디론가 보내졌다. 다양한 생김새의 건물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커다란 새가 알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이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그 도시 속으로. 


The New Country, 2004-5, graphite pencil, digitally coloured, 60 x 40cm


 처음 보는 글자를 들고 있는 소년, 처음 보는 동물을 안고 있는 사람, 처음 보는 물건을 파는 사람,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모두 다 낯선 것 들 뿐이었다. 심지어 내가 갖고 있는 시계로는 이곳이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이정표를 찾았지만 이정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처음 보는 생김새의 사람이 나에게 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를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수첩에 침대를 그려 보여주었다. 그 말을 이해한 검은 피부의 남자는 내가 묵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도착한 숙소는 내가 생각한 모습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 있을 법한 온갖 파이프와 기계 장치들이 오히려 뽐내기라도 하듯 방 내부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 장치들은 내 뜻대로 작동되지 않아 답답하지만 했다. 방 한구석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적인 도자기가 놓여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처음 보는 생김새의 동물이 튀어나왔다. 언뜻 보기에 쥐를 닮은 동물이었다. 그 녀석은 마음대로 2층으로 뛰어가버렸고 뒤따라 올라가니 내가 수첩에 그렸던 것과 똑같이 생긴 침대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제야 침대에 앉아 가방을 풀었다.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싸서 들고 온 나의 가족사진을 꺼내어 벽에 걸어두고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아 두었다. 

이렇게 나는 이상한 것들로 가득 찬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Street life, 2004-5, graphite pencil digitally coloured, 60 x 40cm


- 3 -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이 떠졌을 때 보인 것은 도자기 안에서 나왔던 그 쥐를 닮은 동물이었다. 

 나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그 쥐를 닮은 동물이 내 옆을 함께했다. 지도에 나온 데로 정거장에서 버스나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길을 묻자 길에 세워진 전화기같이 생긴 물건에서 종이 쪼가리를 하나 꺼내어 주었다. 그녀가 알려주는 대로 그 종이를 들고 기다리자 머리 위에서 작은 배처럼 생긴 게 날아왔다. 그녀와 함께 올라타 나는 그녀에게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받은 종이를 보여주며 나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도 같은 종이를 꺼내어 보여주면 자신도 같은 이민자임을 알려주었다. 

An unexpected flatmate (detail), 2004-5, pencil.


 그녀가 살던 고향에서는 강제로 힘든 노동을 했다고 한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아 도망쳐 나왔고 나처럼 이 도시에 도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처음 보는 어떤 동물을 데리고 다녔는데, 나와 함께 온 쥐를 닮은 녀석과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녀의 안내로 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는 그곳에서 빵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빵은 보이지 않았고 신기하게 생긴 물건들만 잔뜩 있었다. 도무지 어디에서 빵을 살 수 있는지 몰라 서성거리고 있을 때 한 소년과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 나에게 처음 보는 음식을 먹어보라고 건네주었다. 나는 빵을 그려서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이상하게 생긴 음식을 보여주기만 했다. 그들이 원하는 데로 한 입 베어 물자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그들은 나에게 신기한 음식을 한 바구니 가득 담아 주었고 나는 그들의 호의에 금세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고향을 떠나온 사연을 들려주었고, 그들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이 살던 곳은 얼굴이 안 보이는 가면은 쓴 거대한 무리들이 마을 사람들을 납치해갔다. 그들을 피해 땅 아래로 도망쳤으며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땅 위로 나왔을 땐 마을은 사라지고 온통 검은 탑들이 빽빽했다고 한다. 거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간신히 뗏목 하나를 타고 이 도시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온통 해괴하고 신기한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식재료로 멋진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 보는 악기도 꽤나 그럴듯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 작은 도자기를 선물하였다.




- 4 -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쥐를 닮은 그 녀석은 이젠 당연하듯 나와 함께 아침을 준비하고 함께 거리를 나섰다. 나는 이 도시에 정착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도시에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이었다. 그런 나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한 번은 벽에 종이를 붙이는 일을 보고 내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일을 맡았지만 이 나라의 문자를 알지 모르는 나는 종이 거꾸로 붙였고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또 한 번은 물건을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배달해 주는 일이었다. 물건에 그려진 글씨의 뜻은 알 수 없어도 그 글씨와 똑같이 생긴 곳을 찾아 통 안에 넣어 놓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에 내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종종 무서운 동물이 집을 지키고 있는 곳이 있었고, 조심하라는 경고판을 읽지 못한 나는 크게 놀라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찾아낸 일은, 나와 같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 줄로 길게 서서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똑같이 생긴 물건들 사이에서 다르게 생긴 물건을 골라내어 긴 파이프 속으로 던져 버리는 일이었다. 

 단조로운 일이 계속되고 허리와 다리가 아파질 때 앞에 서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이 나에게 향이 좋은 음료를 건네었다. 

 그 노인 역시 고향을 떠나온 사람으로 그 살던 곳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끌려 나갔고 자신도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 봐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다리 하나를 잃고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고향을 폐허로 변한 뒤였다고 한다.

 일 끝나고 노인은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했다. 노인이 살고 있는 곳은 눈부신 태양에 나무가 빛이 나고 그 사이로 무늬가 예쁜 새들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했고 우리는 함께 게임을 했다. 나는 그 순간 세상이 너무나도 평온하고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Parklands, 2005, graphite pencil digitally coloured, 60 x 40cm


- 5 -


 나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지를 접어 내가 딸에게 마지막으로 접어 주었던 것과 같은 종이 새를 만들었다. 그동안 모은 돈과 함께 종이 새를 편지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우체통에 담았다. 

 잎에서 새싹이 나고 꽃이 피었고, 꽃에서 열매가 열렸고 그리고 꽃이 시들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방은 이제 익숙함으로 많이 채워졌지만 가족의 빈자리는 그대로였다.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가족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리고 가족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달려 나갔고 드디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6 - 


우리 가족은 이제 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우리의 아침은 이전과 다르지 않지만 모든 게 새롭다. 새로운 시간 속에서 처음 맛보는 차와 함께 새로운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도움 준 따뜻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새로운 도착 자에게 길을 안내한다.  -끝.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무려 4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작가는 수많은 이민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그들의 구술 기록을 바탕으로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도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엮은 책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에는 이야기의 배경, 수많은 스케치와 인터뷰 자료가 담겨 있으니 함께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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