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Mar 22. 2023

길 위에서 만난 붓다

남방불교 이야기 #2  미얀마 사가잉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69-71>




Intro. 

만달레이의 외곽 마을인 사가잉은 ‘명상의 도시’라 불리운다. 누구나 이 마을에 가면 명상하고 싶어진다는 뜻이리라. 실제로 이 도시의 ‘고요함’과 ‘차분함’이란 대도시의 ‘번쩍거림’에 익숙한 현대인에겐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에이야와디(Ayeyarwaddy)강을 따라 흰색의 파고다들이 산 등성이에 점점이 구슬처럼 밖혀있다. 언덕전체가 불교사원과 파고다로 가득하다. 사가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중간에 시타구대학(Sitagu Buddist Academy)이 있다. 종을 거꾸로 놓은 형태의 거대한 황금색 불탑이 나를 맞이한다. 주변을 둘러본 후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해 있다. 이 대학 학생들은 모두 승려시험을 통과한 엘리트 승려들이다. 짙은 자주색 가사를 걸친 이 승려학생들은 강의 내용을 놓칠세라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다.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가 교실의자에 앉았다. 



사가잉 시타구 대학


문득, 대학 1학년 때 들었던 길희성 교수의 <힌두교의 이해>란 종교학 강의가 떠오른다.  <힌두교의 이해>란 수업에서 길희성 교수는 칠판 한가득 담길 정도로 큰 글자로 ‘진아!’라고 썼다. 그때 나의 질문은 ‘진아를 찾으면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만약 내가 행복해진다면 내가 본 인도의 빈민문제, 이 지구촌의 빈곤, 인권, 평화, 환경 등의 문제도 해결 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대학교 1학년 때의 그 답답한 종교강의 시간을 떠올린 순간, 나는 싯타구 대학 교실로 들어오는 붓다를 만났다. 그의 모습에서는 알 수 없는 편안함과 미소, 그리고 위엄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특별한 힘에 이끌려 붓다에게 다가갔다. 아마도 지금 내가 느낀 감정이 고행을 포기한 배신자라고 생각하며 멀리 떠났던 오비구가 성도 후에 그들을 찾아온 붓다를 만났을 때 그 놀라운 느낌이 아닐까. 나는 남방불교식 예법인 붓다의 발에 머리를 대고 존경을 표하였다.  붓다와의 이 특별한 만남을 ‘붓다와의 즉문즉설’이라 칭한다.          


붓다와의 즉문즉설


붓다: 여행중인 그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구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이 나 고민이 무엇인지 내게 내어놓아보시오. 내가 설해 보리이다.


나: 만델레이 길거리의 싼 음식을 먹고 배탈이나 매우 고생중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보다 배탈이 심하셔서 오늘 시타구대학에는 함께 방문을 못하고 숙소에서 쉬고 계십니다. 


붓다: 육체적 괴로움을 겪고 있군. 생노병사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지. 그러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마시오. 


나: 두번째 화살이란 무엇입니까.


붓다: 육체적 괴로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아라한도 육체적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화살이지요. 그러나 수행을 한 자는 그 육체적 괴로움을 정신적 괴로움으로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두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나: 눈뜬 분이시여, 예를 들어 주십시오. 


붓다: 몸이 아픈 것은 화살을 한 대 맞은 것이고, 몸이 아플 때 화를 내거나 우울해하거나 불안해 하면 화살을 한대 더 맞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그냥 ‘아프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되면 어쩌지, 불치병이 아닌가, 내가 아프면 가족은 누가 돌보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마음까지 괴로워지고 아픈 몸이 더 아프도록 계속 화살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래도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받고 배탈로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래는 춘다를 비난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육체적 괴로움의 원인을 다른 곳에 전가시키는 것, 그리하여 정신적 괴로움을 증가시키는 것, 이것이 두번째 화살이니 그 화살은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행복한 분이시여, 그렇다면 칭찬이나 비난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예를 더 들어주십시오. 


붓다: 좋습니다. 내가 탁발을 하러 어느 바라문 집 앞에 서 있을 때 일입니다. 그 주인은 나에게 ‘멀쩡한 놈이 왜 빌어먹고 사느냐!’라며 음식을 주기는 커녕, 비난과 욕설의 화살을 내게 쏜 것이지요. 나는 빙그레 미소짓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바라문은 ‘아니 네가 웃어?’ 라며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에게 꽃다발을 선물한다면 그걸 받습니까?’

‘당연히 받지요.’

나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에게 쓰레기를 안긴다면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안받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내게 비난과 욕설을 퍼부을 때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난과 욕설은 누구의 것입니까? ‘

『사십이장경』 제 7장 中에서 



그러므로 두번째 화살은 맞아서는 안됩니다. 비난이나 욕설의 화살을 맞은 사람은 화살을 쏜 사람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화살 맞으면 그 즉시 첫번 째 화살은 뽑아내야하는데 그러지않고 이 화살은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지, 누가 쏘았지, 왜 내게 쏜거지 등등의 온갖 마음을 쏟고 진정 필요한 조치인 화살은 즉시 뽑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비난한 자, 나에게 욕설을 한 자를 생각하며 또 다른 괴로움인 두번째, 세번째 화살을 연속으로 맞고 증오와 분노 그리고 마침내 절망에 빠져 삶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 참 좋은 깨달음의 비유이십니다. 그렇다면 칭찬의 경우도 그러합니까? 누군가의 칭찬이나 아부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계속 유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붓다: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말라’ 라고 나는 말한다오. 비난의 화살이나 칭찬의 폭포수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선정을 닦은 자들의 이익입니다.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합니다. (『숫타니파타』)


나:  부처님은 눈 먼자의 눈을 뜨게 하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행복의 스승이십니다. 하지만 중생인 저는 여전히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저의 평생의 주제는 ‘평화’입니다. 왜 세상에는 수많은 빈곤층이 존재할까요? 왜 이 세상은 끝없는 인권침해와 전쟁이 자행되는 걸까요? 대체 어떤 제도나 구조가 있어야 이 같은 고통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이와 같은 고민들을 수업시간에 현재 20대인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저를 ‘인류의 평화’나 고민하는 한가하고 배부른 ‘공상주의자’로 바라봅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 또 제 마음이 괴로워집니다 제도나 구조가 평화를 만들 수 있는가,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서 과연 ‘기회의 공정성’은 존재하는가 이런 문제들은 끊임없이 답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한국의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흙수저로 태어난 무기력함을 느낀 나머지 그들의 조국을 헬조선이라 여깁니다. 저는 이런 고민을 안고 사는 한국의 청년들을 만나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을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대심문관 앞에 선 붓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빈곤과 고통을 무시한 죄로 절대권력을 쥔 대심문관에게 체포됩니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라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가 ‘빵’으로 대표되는 모든 물질적 조건이 가져오는 강력한 힘과 안정성을 배척했다는 것이죠. 대심문관은 인간은 본디 무력하고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악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끔찍한 고통이라고 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강력한 힘과 물질적 안정, 즉 ‘빵’이라는 것이죠. 대심문관편을 볼때마다 오늘 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외침을 듣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대심문관의 답변에 침묵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라면 예수님께 어떤 변호를 해주시겠습니까? 


붓다: (그러자 붓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예수도 침묵했는데 나도 침묵하는 게 맞지 않을런지요.  삶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게 상책이거든. 그걸 후대 사람들은 무기(無記)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한번 예수를 변호해 보리다. 예수도 어찌 빈곤을 찬양했겠습니까. 산 위에 모인 5천명의 청중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낼 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안내하며 야훼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주기도 했었지요. 그러니까 예수도 ‘절대적 빈곤’에는 무관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기적’을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기적의 힘이 아니라 ‘자각’의 힘으로 문제를 극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 예수가 본 것은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인간의 높은 가치인 자유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를 포기한 민중구제는 결국 전체주의라는 더 두려운 세상이 온다는 것을 예수는 알고 있었을 것이나 민중들은 예수의 깊은 뜻을 못헤아릴 것이기에 침묵했을 것이라봅니다. 


나: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입니까? 


붓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진정한 인간정신의 해방을 말합니다. 이것을 ‘대자유’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나: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니 니체가 생각나는군요. 니체는 인간의 삶을 세 가지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낙타의 삶, 사자의 삶,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삶입니다. 내 의지와는 전혀 다른 짐을 지고 한평생을 살아가는 낙타, 세상을 지배하지만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사자, 그리고 캔버스 위에 마음대로 자기의 세상을 그려가는 어린이를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도 의식주가 보장된 노예적 낙타에서 벗어나고, 사자의 외로움과 어린이의 자유가 결합된 무소 같은 삶을 말씀하시는 거죠?       


붓다: 나는 범부대중에게 ‘무엇이 ‘짐’인가, 그 짐은 어떻게 내려놓는가를 설하였습니다.(짐경) 짐이란 ‘오온’, 즉 다섯가지 무더기인 색,수,상,행,식을 가르치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을 내려놓으라는 것은 곧 오온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오온의 무더기 속 공성을 보면 무거운 짐도 한 순간 사라지는 것이죠. 탐.진.치 삼독으로 오염된 욕계를 벗어나 염오를 통해 헛된 욕망을 버리고, 나아가 수행을 통해 해탈의 경지로 가라는 것이 내 가르침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괴로움은 타인이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만든 것입니까? 만약 나의 이 괴로움과 고통이 타인이 만든 것이라면 나는 결코 그 괴로움을 풀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를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의 괴로움은 대부분 스스로의 속박에 의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문제해결에 실마리입니다. 만약 타인이 엄청난 힘으로 나를 속박했다면 나는 결코 그 속박의 끈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가 묶어놓은 이 속박의 밧줄은 내 힘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나: 훌륭한 비유이십니다. 부처님. 그럼 이제 불쌍한 중생인 저를 좀 변호 해주십시오. 자유다, 평화다, 민주다, 정의다하는 그런 공허한 이념을 가지고 떠들지 말고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를 말하라는 논리 앞에서 저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붓다: 자유나 평화는 유식론적 관점에서 보면 표상이나 심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외로운 달, 슬픈 찔레꽃 향기 등이 인간의 마음이 투영된 표상이듯, 심상이란 실제하지 않는 것을 마치 실제하는 것처럼 마음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대가 아버지 함께 뱀사원에서 사유한 것도 바로 심상과 표상에서 오는 허위의식이 아니었습니까. 그 관점에서 본다면 그대가 말하는 평화나 자유라는 것도, 젊은 학생들이 주장하는 실용적인 가치라는 것도 모두 심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행복과 대 자유로 나가는 해탈의 문입니다. 


나: 그렇군요. 저 역시 뱀사원의 경험을 통해 표상과 심상이 모두 대상의 본질이 아님을 알았으면서도 그 원리를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었군요.


붓다: 예수가 주는 평화가 세속에서의 평화가 아니듯 내가 말하는 행복과 평화 또한 욕계 내에 갇힌 행복이 아닙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빵이나, 제도나 정책 같은 외부적 요인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대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대의 마음에 있는 것임을 나는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 괴로움의 근본원인은 ‘갈애’로 표현되는 ‘집착’에 있는 것이오. 그 집착은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며, 그 소멸의 길을 나는 발견하고 범부중생들의 삶에 해방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지요. 


나: 부처님께서 ‘사성제’와 ‘팔정도’를 말씀하시는군요.


붓다: 그렇습니다. 내가 발견한 이 네가지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상, 고, 무아’임을 통찰하는데 있습니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물질은 생주이멸, 생명은 생노병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존재의 무상함을 모르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는 상(像)에 사로잡혀 있지요. 그러니까 한국의 청년들이 괴로워하는 것은 제도나 혁명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분별심을 떠나려는 ‘중도’에서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나: 그렇다면 오늘 날 한국의 소위 ‘금수저’라 일컫어지는 이들도 ‘흙수저’만큼 괴로울 수 있다는 거군요. 


붓다: 천억을 가진 사람도 자기는 부자가 아니라고 한다는 말을 합니다. 한국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부, 명예, 권력, 그리고 나아가 아름다움도 모두 무상한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데 본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보시오,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범무중생이 소망하는 금수저를 넘어선 ‘다이아몬드 수저’ 출신입니다. 그러나 나는 왕위도 버리고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버리고 인간 괴로움의 근본 문제해결을 찾아서 출가했고 마침내 쾌락을 통해서도,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양극단을 떠난‘중도’의 길을 찾았습니다. 


나: 붓다께서 성도하신 후 바라나시 이시파타나(사르나트)에서 수행중이던 오비구를 찾아서 설법하셨지요. 저는 그 곳을 19살 때 다녀왔습니다. 그 곳 한국 사원, 녹야원에서 2박을 하며 고요와 평안을 맛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이제 저에게 오비구에게 설하신 첫 설법을 전해주시겠습니까. 


초전 법륜경,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四聖諦) 

 

다: 나는 오비구에게 네 가지 진리, 고집멸도를 설했습니다. 바른 삼매를 닦는 이유도, 출가자가 되는 이유도 모두 사성제를 알기 위함입니다(S56:1). 괴로움’의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 것(死)은 괴로움이며, 싫은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怨憎會苦)으며,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愛別離苦)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求不得苦)이며,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가지 무더기(五蘊)’도 괴로움(五蘊盛告)입니다. (S56:11『초전법륜경』)이것을 한국의 불자들은 ‘4고8고’라 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소멸되며, 소멸되는 길이 있음이 불변의 진리임을 나는 오비구에게 가르친 것이라오. 


나: 부처님, 집착의 대상이 되는‘다섯무더기의 괴로움(五蘊) (오온성고) 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온성고란 무엇입니까? 


붓다: ‘나’는 곧 ‘오온의 무더기’입니다. 오온이란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분별심)의 다섯 무더기를 말합니다. 여기서 물질은 몸을 구성하는 성분이고 느낌, 인식, 심리현상과 알음알이는 마음을 구성하는 성분이지요. ‘나’는 이렇게 실체가 없는 ‘오온의 무더기’인데 괴로움은 이 ‘무더기’를 ‘무더기’로 보지 못하고 ‘나’ 또는 ‘내것’이라고 취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나: 부처님, 그렇다면 왜 ‘나’라는 존재는 ‘오온의 무더기’로 해체해서 보아야하는건가요?


붓다: ‘나’라는 존재를 해체해서 본 것은‘나’라는 ‘대상’이 없다가 아니라 ‘고정 불변하는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범위 내에서만 ‘나’라는 존재가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수억겹의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그러나 고정불변하는 ‘나’는 없지요. 예컨데 지금 그대 앞에 놓인 이 컵은 분명 눈 앞에 존재하는 불변의 존재로 보일 것이오. 그러나 이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컵도 무한한 시간 속에서 보면 결국 사라지고 마는 존재일 것이오. 거대한 바위 덩어리도 불변의 존재가 아닙니다. 돌덩이에서 자갈로, 자갈에서 다시 모래로 변합니다. 모래가 뭉쳐서 자갈이, 자갈이 뭉쳐서 돌덩이로, 돌덩이가 더 크게 결합하여 거대한 바위가 되지요. 이것이 무상입니다. 


나: 무상의 예를 더 들어주십시오. 


붓다;우리는 여름내내 우는 매미를 볼 때 고작 일주일 살다 죽을 걸 왜 저리도 악을 쓰고 사는가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수명 또한 매미의 수명과 크게 다를바가 없소. 우주의 시간 속에서 보면, 100년이란 세월도 한 찰라에 불과한 것이라오. 매미의 일주일이나 인간의 100년이나 결국 다 찰라적인 존재인 것이지. 


나: 부처님, 괴로움이 무엇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다면 어떻게하면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고락중도 

 

붓다: 출가 수행자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여야 합니다. 그 두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감각적인 쾌락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하찮고 유익함이 없습니다. 둘째, 지나친 고행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고 저열하고 유익함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치우침이 없이 중도를 깨달았습니다. 중도는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이끕니다. (S56;11)


나: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의 개념과 공자가 말한 ‘중용’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의 개념은 어떻게 다른가요? 공자의 제자인, 자사가 쓴 <중용>의 주석에서 주자는 중용(中庸)을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이름이라고 하여,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찾아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中道)는 양극단의 중간에 도덕적인 덕(德, virtue)이 있다고 봅니다. 즉 “용기(勇氣)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며, 관용(寬容)은 낭비와 인색의 중용이고, 긍지(矜持)는 허영과 비굴의 중용이요, 기지(機智)는 익살과 아둔함의 중용이며, 겸손(謙遜)은 수줍음과 몰염치의 중용이다”라는 것이죠. 하지만 붓다께서 말씀하신 ‘중도’는 ‘양극단의 중간 어느 지점’ 또는 ‘양극단의 평균값’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중도란 무엇입니까?     


여덟까지 바른 길(팔정도) 

 

붓다: 모든 것이 있다는 것(有)은 하나의 극단입니다. 모든 것이 없다(無)는 것도 또 다른 극단입니다.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中)에 의지해서 법을 설합니다. (S12:15)깨달음의 지혜인 중도는 곧 여덟가지의 바른 길(팔정도)를 말합니다. 여덟까지 바른 길이란 ‘바른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수단(正命), 바른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그리고 바른 삼매/집중 (正定)을 말합니다. 이 여덟가지의 바른 길은 중도로 가는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통해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S56:11 『초전법륜경』)


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가 ‘여덟가지 바른 길’이라면 그것은 공자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철학’이 아니라 ‘실천체계’를 말하는 것이군요. 


나: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설명하시면서 어떤 특정한 한가지만을 도라고 하지 않고 여덟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여덟까지 도’가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계발되어 나갈 때, 그것이 바른 도인 ‘중도’임을 깨달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중도인 팔정도 수행은 언제, 어떻게 해야하는 것입니까? 


붓다: 수행은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하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요. 사찰이나 선방, 명상센터를 찾아간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매 순간이 머무는 곳, 바로 지금 여기에서 팔정도를 실천하길 바랍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를 말하는 붓다는 2500년전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내 마음에서 다시 ‘현재’로 살아난다. 붓다가 전해준 이야기들이 온통 머리 속을 꽉채운다. 그런데 아무래도 잘 이해가 안되는 구절이 있다. ‘오온의 무더기’인 ‘나’라는 존재를 해체하여 그 변화성과 무상성을 만날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분명 ‘나’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데 ‘나’라는 존재가 없다?! 수행이란 ‘참나’가 아니라 ‘무아’를 깨닫는 것이 과정이라는 붓다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내가 없다면 열반에 이르지 못한 ‘나’의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혼란스럽다. 풀리지 않은 질문을 안고 한동안 고뇌에 빠져있는 내 마음을 이미 읽었다는 듯 붓다는 빙그레 웃으먼서 내게 두번째 주제인 <무아의 특징>에 대해서 설법하셨다.  


 무아의 경 

 

붓다: 물질은 무아입니다. 만일 물질이 자아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은 무아이기 때문에 고통이 따릅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느낌은, 인식은, 심리현상들은, 알음알이도 또한 이와같습니다. 

(S22:59)


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물질이라는 것은 곧 사대(四大: 地, 水, 火, 風)와 사대로 이루어진 “물질”인 “색”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느낌이란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말하는 것이구요. 인식은 형상화와 언어화를 통하여 옳음과 그름 등으로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심리현상은 해야하는 ‘행’, 하지 않아야하는 행,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행 등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알음알이란 비교하고 분별하는 의식활동인 식(識)을 말하는 것이라 이해됩니다. 범일스님은 <니까야 독송집>에서 오온을 위와 같이 정리하고 계십니다. 맞습니까? 


붓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래로 다른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 염오해야합니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해탈로 태어남은 다했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S22:59)


나: 그러니까 “오온을 버리라!”는 말씀이군요.


붓다: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아치, 아만 등의 4가지 번뇌의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나: 부처님, 무아를 말씀하시니 대학교 1학년 때 시험답안지에서 적지 못한 내용이 생각납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이것이 무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붓다: 브라만교 또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업’, ‘윤회’, ‘해탈’의 개념은 내가 왕자 시절부터 충분히 알았던 내용이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자아(아트만)은 인정할 수가 없었소. 불변하는 자아인 참나가 브라만 신과 한몸이 되는 것이 힌두교도의 목표이며 이를 범아일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 가르침은 다릅니다. 나는 무아(아나따)를 주장합니다. 무아 사상이야 말로 이 세상 모든 종교와 차별화시키는 나만의 독특한 사상체계입니다. 무아가 없으면 그것은 다른 종교일수는 있어도 불교는 아닙니다. 자아이론은 고정 불변의 ‘나’가 있어서, 다음 생에 그대로 태어난다는 것이지만 나의 ‘무아’개념은 의식의 ‘흐름’(의식의 상속)의 말하는 것이라오. 다시말해, 의식의 흐름 속에서의 윤회를 말하는 것이라오.  


나: 예를 들어 주십시오. 


붓다: 나카세나 존자가 밀린다 왕에게 잘 설명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 촛불하나가 있다고 합시다. 이 촛불이 다 타는 순간 촛불은 다음 촛불로 붙습니다. 처음 촛불과 두번째, 세번째 촛불은 다른 촛불일까요? 같은 촛불도 아니고 다른 촛불도 아니겠지요? 이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입니다. 들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들불이 시작되면 모든 들판을 다 태웁니다. 처음 들불과 마지막 들불은 같은 들불일까요? 첫번째 들불이 마지막 들불로 이어지는 것 이것은 분명, 실체가 아니라 영속적인 ‘흐름’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이면서 윤회가 가능한 좋은 예일 수 있습니다. 


나: 잘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오비구에 말씀하신 초전법륜경과 무아의 특징경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붓다: 수행의 길을 가야합니다. 


나: 수행이라고 함은 명상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붓다: 숨에 집중하고 명상에 잠겨보세요. 그리고 그 생노병사의 고독한 길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작가의 이전글 길 위에서 만난 붓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